독자마당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icon 수구기득권
icon 2016-12-26 13:51:55  |  icon 조회: 4371
첨부파일 : -
[ ...... 서울시경은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1965.7.27. 동아일보



..........................................................................................................................

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

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운집햇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꿍어 영구행려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


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




............................................................................................................................

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727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7-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3465&publishType=00020




* 1965년의 서울인구는 3백80만






..............................................................................................................................

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








[ 이승만 ]



.............................................................................................................

“독재자는 자기 친족과 재산을 챙기기 마련이지만 이 대통령은 하야 이후 사람 키 만한 박스에 막대기를 꽂아 옷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





......................................................................................................................

5월29일 대통령 부부는 하와이로 떠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집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길로 李承晩 대통령은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짐은 전부 네 개였는데 옷을 담은 트렁크 두 개와 마실 것과 점심, 약품을 담은 가방 하나, 타자기 가방이 전부였다.

..........................................................................................................





..............................................................................................................

還國(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崔伯烈씨에게 『나를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 나는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라며 신발을 찾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李대통령은 여비를 崔伯烈씨와 윌버트 최씨가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해도 여비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이발을 하지 않아 프란체스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어야 했다.


시장에서 식품을 사올 때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며 나무랐다. 李대통령이 물건을 구입하면 걱정을 많이 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식료품을 사러 갔다.
.............................................................................................


시간이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해진다는 李대통령 주치의의 판정에 따라 1962년 3월17일, 부부는 귀국을 결정했다.


출발 사흘 전부터 보행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李대통령은 섭섭해 하는 교포들에게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출발 당일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뒤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찾아왔다.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영사가 귀국을 만류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李承晩 대통령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가기 바라오』그렇게 말하면서 휠체어에 몸을 기댄 李대통령은 다시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다.

...........................................................................................................................






.................................................................................................................

비서 역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서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3등 열 차나 3등 선실만 골라서 타고 다니는 남편 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관해 불평을 말하 는 일이 없었다. 신혼 초에 두 사람은 궁핍 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 할 때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한 끼의 식 사에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해 목이 메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책에 기록하고 있다.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하던 시절, 식비를 아끼기 위해 바나나와 날달걀 로 끼니를 때웠다. 날달걀 먹는 것을 이상 스럽게 생각하는 서양사람들이 많아 껍질을 종이에 싸서 버려야 했다. 워싱턴에 살 때 부부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눈을 치운 적도 있 다. 주변에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 이 없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눈을 치웠던 것이다.


李박사는 독립운동 시절 미국 시민권이 없 어 곤란을 겪곤 했다. 美국무성에 근무하던 시플리 여사는 非공식 여권을 만들 때마다 신경 쓸 일이 많다며 프란체스카에게 『남 편이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권했다 . 프란체스카가 시민권 얘기를 꺼내자 李박 사는 『한국이 곧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 시오』라고 말했다.


결혼을 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고충을 겪어야 했다 .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 강」에 『당당한 무국적자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압도당했다』고 기술했다.

.....................................................................................

독신생활을 할 때 사과 한 개로 하루를 지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생일날 굶은 적도 있다.
....................................................................................

결혼 후 프란체스카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남편의 면모에 놀라곤 했다. 특히 李박사의 운전습관은 그녀를 경악하게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李박사는 이곳저곳 강연과 방송출연, 인터뷰 등으로 대단히 바빴다. 李박사는 약속시간에 맞추느라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프란체스카 는 그때마다 가슴 졸여야 했다. 어느 날 격렬하게 차를 몰자 두 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따라왔다. 李박사는 더욱 속력을 내며 달렸고 경찰은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따라왔다. 제시간에 도착해 프레스클럽에서 강연을 하자 따라온 기동 경찰들은 강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자 경찰들은 강연내용에 감동해 박수를 치다가 프란체스카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 사람뿐 이오. 더 일찍 천당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

.................................................................................................................






.................................................................................................................

첫 월급을 건넬 때 李박사는 아내에게 「安貧樂業」(안빈낙업)이라는 글씨를 써주면서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 수에 맞게 생활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미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12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그 일은 힘들지 않았다. 돈암장에서 마포장, 이화장을 거쳐 대통령 관저 경무대의 주인이 된 李대통령은 스스로가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

경무대는 일본식과 미국식이 뒤섞인 불편하 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일본인 총독 미나 미가 지은 이 건물에는 역대 조선 총독들이 살았으며 李대통령이 입주하기 전에 미군 하지 장군이 살았다.


일본식인 다다미방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李대통령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무대를 개조하지 않았다. 목욕탕의 욕조가 너무 좁아 욕조 한편을 파내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다. 李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다 보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며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 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 없었다.


경무대 공보실장을 지낸 吳在璟(오재경·前 공보부 장관)씨는 어느 날 밤 경무대 갔다 가 이층에서 내려오는 대통령 부부를 보고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2층에서 가운을 입고 내려오시는데 어느 양로원에서 온 것 같았어요. 커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일본 시대 쓰던 그대로였죠.

경무대를 하나도 수리하지 않고 사용할 정도였어요』

.....................................................................................................................






.................................................................................................................

6월27일 새벽 2시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 과 李起鵬(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씨가 李대통령에게 南下(남하)를 권유했을 때 『 서울을 사수해야 해. 나는 안 떠나겠네』 하며 화난 걸음으로 침실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이어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어 려운 때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라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수원으로 잠시 내 려갔다가 곧 올라오시면 어떨까요?』하고 간곡히 말했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질렀다.


그때 경무대 경찰 간부가 청량리까지 적군이 들어왔다는 긴급보고를 했고 申장관이


『잠깐만 수원까지 내려가 주시면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고 꼭 서울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긴급보고가 이어지자 대통령 일행은 새벽 3시 30분 경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경무대 금고를 다 털었을 때 5만원밖에 없어 그 돈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5만원은 요즘 화폐 가치로 따졌을 때 2만원 남짓한 돈이다.
.....................................................................................................

대구에 피난갔을 때 曺在千(조재천) 경북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 부부와 정부각료 국회의원 등 70여 명이 함께 지냈다. 수발을 드느라 曺지사 부인이 유산을 하기까지 했다.


李대통령은 부인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아침에 사과와 토마토, 날달걀을 먹고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를 갔다가 때를 놓쳐 굶는 경우가 많았다.

..............................................................................................................................





........................................................................................................

대통령 부부는 모기에 물린데다 땀띠까지 나서 고생이 심했다.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 고를 부탁하자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 한 박 스까지 보내왔다.


이 약상자를 본 대통령은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申性模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건네주었다. 李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워커 장군이 보낸 약에다 가 오스트리아 처가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들려보냈다.


프란체스카가 申장관에게 땀띠연고 하나만 놓고 가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李박사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申장관은 즉시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 디 프레세」紙 특파원 편에 보내온 비타민 이었다.

...............................................................................

대통령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삼베 홑이불까지 싸보냈다. 대통령 부부는 밤새워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거적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의 형 편을 알리고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보낸 구호품 을 필두로 속속 금품이 도착하였다.



李대통령은 식료품이 많이 들어오면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을 데리고 가서 군인 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양노인을 시켜 계속 쌀값을 체크하면서 전쟁 중의 물가동향을 주시했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프란체스카도 언니의 편지를 받으면 혼자서 눈시울 을 적시곤 했다. 시집온 후 17년 동안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였으나 어머니는 한국전쟁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여비도 없는데다 한시라도 대통령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28서울 수복으로 경무대로 돌아왔을 때 대통령 집무실에 고급양복 웃저고리와 양말, 소련제 양주 등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대변투성이였다.
어디서 약탈해 왔는 지 세탁기 10여 대, 양복장 일곱 개도 있었다. 대강당 바닥에는 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화장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고 몽땅 털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李대통령은 공산군을 『敵(적)이라기보다는 강도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겨울, 이화여대 金活蘭(김활란) 박사가 워커 장군의 동상기금으로 써달라며 교수들의 월급을 모아 경무대를 방문했다. 난로도 안 피우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 하는 李대통령을 보며 金活蘭 박사는 눈물을 글썽였다.


金活蘭 박사가 『연세도 있으 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라』고 권 고하자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면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러 자 프란체스카가 『내 허락 없이는 안 된다 』고 농담하여 오랜만에 대통령 부부는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


1·4 후퇴 때 프란체스카는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중요한 기밀서신 을 타이핑해야 했던 아내가 몹시 괴로워하자 대통령은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프란체스카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자코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시 부산 임시관저에 미국 무초 대사와 미국 장군 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면 동상 치료 연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李대 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신세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결국 李대통령이 가르쳐 준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할 수 있 었다.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생일을 맞았을 때 李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프란체스카는 그때를 가장 잊혀지지 않는 생일날이라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전쟁 중에 李대통령은 「죽음이 결코 두려 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 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 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後嗣(후사) 없이 죽는 게 先塋(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라는 유서를 써 서 갖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後嗣 없는 불효자」란 대목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 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李박사는 화가 나면 가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고 소리를 쳐 아내를 울렸다고 한다.


李대통령은 모제르 권총 한 자루를 머리맡 에 두고 『이것은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 에 우리 둘을 천당으로 보내줄 티켓』이라 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프란체스카가 『우리 두 사람 티켓은 잘 간수 했어요?』 하면 『잘 있지』 하며 크게 웃 곤 했다. 두 사람은 극약도 몸에 지니고 다 녔다.
...............................................................................................................








.............................................................................................................

『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


그런가 하면 李承晩 대통령은 「냉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가 친척들을 경무대에 얼씬도 못 하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甥姪(생질)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 령께서 생질 남매에게 금족령을 내려서 경무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 지요. 그런 분이었으니 당신께서 不正(부정)을 할 리가 없지요. 4·19 때 李대통령이 스위스 은행에 몇백억을 예치해 놓았다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지 금까지 한 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금전적으로 깨끗한 분이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수행원들에게 늘 당부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냉수먹고 된똥 싸라. 밖에 나가서 경무대 석 자를 팔지 말라」고 하셨 어요. 경무대를 등에 없고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말라는 의미였죠. 그 말씀 을 자주 하셔서 항상 수행원들이 가슴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張勉(장면) 정 권이 들어서서 강도 높은 조사를 했지만 경호원 가운데 부정과 연루된 사람 이 없었습니다.

경호원이었던 곽영주씨가 사형을 당한 것은 4·19 때 발포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어느 해는 비서실 예산을 반납시켰을 정도로 경무대 사람들도 검소하게 지냈습니다』



李대통령은 항상 뭔가 골똘히 구상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金正旭씨가 바라본 李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당시 유일 한 돌파구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많이 받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국무위원에 많이 기용되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유학파로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밀가루 한 포라도 더 원조받으려고 애쓰셨습니다. 국무위원 들과 한국말로 하시다가 긴밀한 얘기, 우리 수행원들이 들으면 안되는 얘기들은 영어로 하셨어요. 당시 국무위원들은 상당히 격조 있고 수준 높은 분이었어요. 또 연륜이 있는 분들이었죠』
당시 국무위원 중에 李範奭(이범석) 국무총리와 錢鎭漢(전진한) 사회부 장관이 영어를 좀 못했을 뿐 대부분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

크리스마스 때면 수행원들에게 와이셔츠를 하사하곤 했는데 그것도 모든 수행원들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니라 몇몇에게만 주었다.


『경호원들에게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준다든가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 두 분이 워낙 검소하게 사셨기 때문에 남에게 선물을 줄 만한 물건이 없 었어요. 저도 몇 번 와이셔츠를 받았는데 영광이었지요.

한번은 쓰시던 중 절모를 저에게 하사하셨습니다. 대통령의 중절모를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몹시 기뻐하시더군요. 대통령께서 대신 나에게 충무로에 가서 중절모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李대통령은 좀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어느 해인가 공휴일에 북한 어선이 연평도를 침공했을 때 洪璡基(홍진기) 해무청장과 金貞烈 (김정열) 공군참모총장이 자리에 없어서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



李承晩 대통령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였다. 광나루 워커힐 아래 강가나 경복 궁 內의 경회루에서 매주 토요일 낚시를 했다. 낚시 외에는 가끔 비원을 산 책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곤 하는 것이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모든 시간을 나라 살리는 일에만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 살 만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우리나 라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國運이죠』

.........................................................................................................


전쟁 발발 사흘 후 1차 선발대가 대구로 떠나고 다음날 2차 선발대가 대전으로 갈 때 金正旭씨도 합류했다. 李대통령은 대구에서 대전으로 옮겨와서 『왜 나를 멀리 보내려 하느냐. 나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戰勢(전세)가 좋지 못해 수행원들이 서울로 가려는 李대통령을 충남도지사 관저에 모셨다.


『대전 모기가 대단합니다. 모두들 고생이 많았지요. 戰時여서 대통령 내외 를 편하게 모실 수가 없었어요. 두 분께 따로 식사를 차려드리긴 했지만 먹 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李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 간 머무는 동안 수원으로 가서 미국 측과 회담을 하고 오기도 했다. 대전에서 다시 진해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가기로 결 정했다. 밤이면 등화관제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 어두운데다 초행길이어서 수행원들이 대통령을 안전하게 모시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날 밤 비까지 오고 있었다. 수행원들이 그곳 지리에 밝은 충남도지사에게 안내를 부탁했지만 자유당 소속이 아니었던 그는 거절했다.

...............................................................................................

수행원들에게 별로 말을 건네는 일이 없는 李承晩 대통령이 전쟁중에 질문 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맥아더가 왜놈들을 상륙시켜 北進하자고 하는데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 나」 그렇게 물으셨어요. 모두들 묵묵부답이었지요. 그러자 「나는 왜놈이 한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대겠다. 왜놈은 우리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대통령 일행은 仁川상륙 직후인 9·28 수복 때 서울로 돌아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가게 되었다.
..............................................................................


아내 말 듣지 않았다


金正旭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퍼스트 레이디가 한국 부인이었다면 경무대가 조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족 가운데 아무도 한국에 살지 않아 외척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너무나 검소하 고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계절마다 옷이 한 벌씩밖에 없었어요. 거의 매 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무대에서 모임에 초대되었다가 고픈 배를 안고 돌아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경무대에 초대받았으니 점심을 주겠지 생각하고 왔던 분들이 간단한 다과만 대접받고 가면서 굶고 간다고 말하곤 했죠. 특히 과자를 프란체스카 여 사가 직접 구워 대접하였는데 그 일로 초대받은 이들이 감격하곤 했습니다 』


그는 李起鵬씨를 모질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여자 같은 성격에 마음이 매우 곱고 음성이 조용하고 착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 李起鵬씨의 아내 朴마리아씨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조종하여 李承晩 대통령으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였다는 얘기에 대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부인이 간섭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분이 아니라는 것 이다.



『나중에 국회 부의장을 하셨던 任哲鎬(임철호) 비서관이라는 분이 있었어 요. 그분이 대통령께 바른말을 잘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任비서관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통령께서 흥분하고 심기가 불편해진다며 주의를 줬어요. 프란체스카 여사의 최대 관심사는 남편의 건강이었습니다. 그러자 任비서가 비서직을 그만두고 경무대를 나가 버렸어요.


대통령이 任비서가 필요하니 불러오라고 해서 찾아갔지만 두 번이나 거절하더군요. 또다시 대통령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任비서가 경무대로 돌아왔습 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면 아내 때문에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올 리가 없지요. 李대통령이 연세가 많으셨어도 판단력은 흐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 일에 참견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옆에서 조용히 돕는 분이었습니다. 任비서에게는 단지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런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朴마리아씨는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에 자주 오지 않았다고 한다. 金正旭 씨는 이강석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나깨나 남편 건강을 챙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산책을 갈 때면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꼭 스웨터를 챙겨서 들고 나오십니 다. 자신이 스웨터를 들고 다니면서 좀 쌀쌀하다 싶으면 바로 입혀 드리고 좀 덥다 싶으면 바로 벗겨 드렸어요. 그 정성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수행하면서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배웠 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챙겨 주니 대통령께서 스스로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틈나면 운동하고 장작을 패고 정원의 나무를 직접 자르면서 운동을 하셨죠. 두 분이 늘 산책을 하면서 많이 걸으셨어요』金正旭씨는 지금도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하면 항상 타이프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전한다.


『한 번도 앉아서 편하게 쉬는 걸 못 봤습니다. 늘 분주하게 움직였지요. 집안일 뿐만 아니라 타이프를 치면서 대통령의 일을 많이 도왔습니다』

......................................................................

『당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되는데 백성이 원하면 물러난다며 대통령 께서 이화장으로 향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李대통령의 强點이라면 청렴하고 검소하고 지혜가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라면 단지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죠. 당시 대통령의 나이가 85세였는데 60代 정도만 되셨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

李대통령이 정치를 잘했으며 특히 韓美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높이 살 일이라고 말했다.

말에 좌지우지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러 왔으면 우리 필요에 의해서 미국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미국 측과 마찰이 잦았고 재임 시절 UN 사령관과 미국 대사가 자주 바뀌었어요. 미국 측 인사들에게 항상 당당하셨지요』


金正旭씨는 자유당 정권을 3選 개헌, 3·15 부정선거로만 볼 게 아니라 살기 어려운 시절, 외국 원조를 끌어들여 나라의 기틀을 잡고 어려운 일을 많이 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

『경무대에서 근무한 사람은 옷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玉石 을 가려야지, 무조건 경무대에서 근무했다고 그만두라고 하는 건 부당한 일이죠.

날짜를 소급하여 부정축재자를 가리는 조사를 하겠다고 할 때 나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조사받을 일이 뭐 있습니까?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남 괴롭힌 일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은 깨끗했습니다. 4·19 이후 부정축재자를 소급해서 찾았지만 경무대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효가 지난 뒤 집으로 돌아왔고 그 뒤 조사받은 일이 없었다.

..........................................................

『 그는 李承晩 대통령의 장례식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김포 비행장에서 이화장으로 운구할 때 연도에 너무 많이 운집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원래 계획과 달리 자동차 속도를 올려야 했다.

장례식 당일 이화장에서 과학관이 있던 연근동까지 시민들이 꽉 들어차서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장례식 날 金正旭씨는 장의위원으로 선정되어서 영구차에 타고 함께 국립묘지까지 갔다.

...............................................................................................

. 장례식 차량은 GMC 군용 차량이었는데 이화장 을 떠나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시청 앞 광장으로 가서 李대통령의 육성을 들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시청으로 가지 못하고 바로 국립묘지로 가야 했다.


『국민들이 정말 李承晩 대통령을 사랑했습니다. 장례식 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인 군중들이 그 증거지요. 모두들 통곡을 하며 울었지요』

......................................................................................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법정 최후진술에서 「李박사 이상 존경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는데, 가까이서 뵌 분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경무대 경호원들 중에 생존자가 몇 분 없어 요즘 만남이 좀 뜸하다고 한다. 과묵한 그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 그분 존경하는 마음을 안고 갈 겁니다

...............................................................................................................






---------------------------------------------------------------------





[....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





....................................................................................................................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 생활을 몸소 여준 모범적인 영부인이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술고래였던 청와대 요리사 양학준 노인은 프란체스카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불렀고
모든 면에서 절제하고 아끼는 그녀를 "소금 조금","간장 조금" 이라고 하면서 흉내를 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상당히 근검절약하는여성이였다.(프란체스카, 1988:39-40)


이런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파란 눈의 거리감 있는 영부인이 아니라 알뜰하고 자상한 이웃 할머니와 같은 친근감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다가올 수 있었다.

............................................................................................................






...............................................................................................................

이화장 음식은 검박하고 서민적이다. 새우젓은 으뜸으로 치는 음식 재료다. 찌개도 고기 대신 새우젓을 넣어 담백하게 끓여낸다.


"아버님께서 새우젓 들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어. 우리 집 음식 중에 사치하는 게 있다면 이 새우젓이야. 한 깡통에 8만원 씩이나 하는 걸 1년에 세통은 사야 하니까.".


이화장 안주인인 이대통령 며느리 조혜자(56)씨는 시어머니 프란체 스카 여사 시절 입맛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새우젓국에 집에서 만든 두부를 듬뿍 넣어 부드럽고 고소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 국빈들 을 접대할 때도 평소대로 새우젓을 넣은 찌개를 올리곤 했다.


"우리네 음식이야말로 어머님,아버님이 장수하신 비결이었어. 아버 님은 아흔, 어머님은 아흔둘에 타계하셨는데, 두분 다 기름기를 멀리하 고 콩과 두부를 즐겨 드셨거든.".

...................................................................................................

비지찌개도 거의 빼놓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이대통령 양자인 이화 장 주인 이인수 박사 역시 부모 입맛을 그대로 닮았다. "우리집 비지찌 개는 꼭 두부를 걸러낸 비지로 만들어. 뭐니뭐니 해도 그게 비지의 제 맛이라고 어른들께 배웠거든. 우리집 양반도 비지찌개 하나면 밥 한 그 릇을 금방 비우시지.".


경무대 시절 주방에서 좀더 고급스럽게 만든다고 두부를 거르지 않 은 비지를 썼다. 그랬더니 이대통령은 "이 맛이 아닌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조씨가 끓여낸 비지찌개는 맛과 모양새가 토속적이다. 걸쭉하고 투박한 "진짜 비지"와 풋고추, 홍고추가 어우러져 영락없는 시골집 어매 손맛이다.


"어머님은 김치를 담그시다가 무가 달고 맛있으면 깎아 나눠주시곤 했어.시루떡을 즐겨 드셨고 떡국 끓이는 솜씨는 전문가셨지. 하와이 망명시절에 어머님이 끓이신 떡국이 어찌나 맛있든지 아버님께서 단숨에 두그릇을 비우셨대. 전형적인 한국 아낙이셨지. 국민들이 못 먹고 못 입는데 어떻게 사치하느냐고 입버릇처럼 걱정하시던 분이야.".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협립우산 한개를 30년 넘도록 사용했고, 옷은 물론 양말과 스타킹도 기워 신었다. 열두폭 스 란치마를 휘날리지 않았어도 생활에서 배어나던 그의 기품이 아직도 이 화장 거실에 배어있다.

................................................................................................................






"KNCC 마저" 여권 당혹감

[한국일보 2004-09-14 ]


........................................................................................................

백 총무는 또 “얼마 전 속초에 갔다가 김일성 별장을 수리하는 사람에게 주민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수리하지 않느냐’고 묻더라”며 “국민들이 매사 그런 식으로 보고 있다”고 국보법 폐지에 대한 국민정서를 전했다.
.......................................................................................................






--------------------------------------------------




[ 박정희 ]



.......................................................................................................................

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1579&C_CC=AZ

명동에서 철조망 치고 농사짓는 사나이

趙甲濟






............................................................................................................................


그는 또 1960, 70년대 학교에서 매주 한번씩 실시했던 ‘분식의 날’을 언급하며 “보통 보리밥이나 콩밥을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박 전 대표는 메추리알 크기의 감자만 도시락에 가득 담아왔다. 몸소 실천하는 자세와 국민과 함께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1100

"박근혜는 학생때도 원칙주의자"
[중앙일보] 입력 2009.05.09







.....................................................................................................................................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







.....................................................................................................................

-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40796

“5·16은 근대화 혁명이라고 국내학자들도 이젠 인정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09.10.24







......................................................................................................................


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454707&ctg=10

<김정렴정치회고록>16. 박정희 대통령의 근검절약

[중앙일보] 입력 1997.05.15





*

.............................................................................................................


그러나 1971년 다수확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영농기술이 향상되면서 1977년 쌀 자급 시대가 열렸다. 정부는 분식의 날도 없애고 쌀 막걸리 제조도 14년 만에 허용했다.

...............................................................................................................








...................................................................................................................


―정식 직원으로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이발을 하기 시작한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권유 때문이었습니까


『1969년 청와대 內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도 마련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간이 이발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15평 규모의 전용 이발관이 마련된 직후 하루는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시기 위해 저를 찾는다는 전갈이 부속실에서 왔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청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朴대통령께서는 이발을 하시기 위해 이발관으로 들어오셔서는 저를 보고 「朴군, 이제 이발 시설도 갖추고 했으니 왔다갔다 하지 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어떤가」고 물어 오셨습니다. 제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대통령께서 재차 「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싫은가」고 하시더군요. 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지시를 받들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죠.

.......................................................................................

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소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날로 이발관 문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朴씨는 이날부터 19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他界하는 날까지 항상 朴대통령 곁에서 생활했었다.



『朴대통령은 싸구려 스킨 로션을 좋아했다』



―朴대통령은 주로 언제 이발을 했습니까


『이발을 하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발은 주로 일주일에 한 번, 드라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셨는데, 아침 식사를 하시기 전에 하셨고 소요시간은 30분 정도였습니다. 물론 國事(국사)로 바쁘실 때에는 한 달 가까이 이발을 하지 않으신 적도 있습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히 머리 감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뜨거 운 물에 담가 그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른 다음 스킨을 머리에 바르는 것으 로 이발을 끝냅니다. 대통령께서는 스킨 로션도 비싼 외제 같은 것은 싫어 하시고 그 당시 국산 중에서도 가장 값이 싼 특정회사의 제품을 좋아하셨습 니다. 향기가 마음에 드신다나요.
............................................................................................


―朴대통령이 이발을 할 때 陸英修 여사도 자주 이발관에 오시곤했다는 얘 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랬습니다. 陸여사께서 자주 이발관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朴대통령 머 리 만져드릴 수건을 적당한 온도의 물에 적셔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여름에도 절전운동 때문에 이발관에 에어컨을 잘 가동하지 않았는데, 陸여 사께서 선풍기를 들고 오셔서 朴대통령에게 틀어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朴대통령은 곱슬머리』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

朴씨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가지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소개해주었다. 신축한 비서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1966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이때는 전용 이발 공간이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 돼 있지 않아 더운물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사용했 다고 한다. 이날도 陸여사가 더운물과 찬물을 양동이에 받아와 세면대에 담아 놓았는데 머리를 감던 중 朴대통령이 비눗물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허리를 다쳐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다는 것.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타일이 부착돼 있지 않은데다 세면대도 낮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朴씨는 당시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이처럼 낡은 시설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 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 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


http://monthly.chosun.com/client/reporter/writerboardread.asp?idx=28&cPage=16&wid=soonj

청와대 이발사가 본 「인간 박정희」; 『어르신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송승호

발행일 : 2001.11.01








파리 잡으러 다니는 대통령




박대통령은 무거운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하고, 부채질을 했었다. 지독한 대통령이었다. '에어컨은 관광호텔에서 외국 관광객에게 외화를 벌어들일 때나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부속실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워서 에어컨 대신 환풍기를 개조해서 시원한 바람이 돌게 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을 에어컨 켠 것으로 잘못 안 박대통령은 저녁을 먹으면서 근혜씨에게 '오늘 낮에 에어컨을 켰던데 앞으론 절대 못하게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에어컨 대신에 집무실 창문이 열러 있는 때가 많았다. 덕분에 곧잘 파리가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는 대통령을 귀찮게 했다. 그럴 때면 대통령은 파리채를 들고 파리사냥을 다녔다.

...............................................................................................................

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46








.......................................................................................................


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빅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 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

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33







...........................................................................................................................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2016-12-26 13:51:55
121.167.100.19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