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눈물의 사모곡(思母哭)
<비로봉에서>눈물의 사모곡(思母哭)
  • 심규정기자
  • 승인 2017.07.1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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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규정<원주신문 편집장>

어머니의 고향은 횡성군 안흥면이다. 자그마한 키에 나약하게 보이지만, 그녀는 억척스러웠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 1년에 10번도 넘는 제사상을 묵묵히 차리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동생(3명), 시누이 결혼까지 시킨 어머니 같은 형수님, 친언니 같은 올케였다. 아버님의 건강이 안좋으실 때는 직접 화장품 가방을 메고 이동네 저동네 비포장길을 다니며 생업을 책임지셨으니 나에게 어머니는 ‘스트롱우먼’ 그 자체였다. 필자 형제는 4남1녀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식들을 보란 듯이 키워 내셨다.

85살의 어머니는 현재 병상에 누워 계신다. 지난해 이맘때쯤. 간혹 지병 때문에 병원신세를 지셨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급속도로 쇠약해 지셨다. 원주에서 모시다 안되겠다 싶어 형제들 간에 논의 끝에 경기도 용인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병원과 가까운 수원에 형님 두분이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 심지어 말씀도 못하실 정도였다. 어머니의 이런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가족들은 가슴이 미어졌다. 야속한 세월을 탓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미웠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셨던 어머니는 그러나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병문안 간 자식들이 손주.손녀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하면 힘겹지만,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름을 말하셨다. 그리고는 입을 굳게 닫으셨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아련한 추억을 되돌아 보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대학교에 합격하고도 어려운 집안형편에 공장에 취업해 돈을 벌겠다고 하자, “내가 꼭 졸업시킬테니, 입학하라”며 빚내서 꼬박꼬박 학비를 대주시던 어머니, 대학교 졸업하기 전 신문사에 입사하자,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어머니, 노.사간 심한 갈등을 빚던 신문사에서 앞날이 불투명해 하소연하자, 다음날 새벽버스를 타고 수원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위로해 주시던 어머니, 이날 그녀의 보자기에는 미숫가루 탄 물통이 있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수많은 음식 가운데 그 때 마신 미숫가루 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아침 못먹었지, 배고플 텐데, 어여 먹어라”, 10년간의 신문사 생활을 접고 고향 방송사로 옮기자, 어머니는 아들이 TV에 나오는 저녁 뉴스시간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TV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방송사에서 쫓겨나자, 무직자가 된 아들에게 “너의 길을 응원하겠다”며 끝까지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셨다. 원대한 꿈을 품고 도전한 지방선거에서 낙선해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던 아들을 ‘너는 다시 일어설수 있을 거야’라며 용기백배(勇氣百倍)주시던 어머니, “신문을 만들어 싶다”고 하자, 선뜻 종잣돈을 내주시던 어머니. 거대한 장송처럼,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것 같았던 어머니는 이제 누구의 도움없이는 움직일수 없는 아이신세가 됐다. 

최근 가족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갔다. “어머니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큰 형님의 희소식에 설렌 가슴을 추스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이쁘게 단장한 어머니는 새색시처럼 고왔다. 눈은 총명했고, 얼굴 빛은 환했다. “엄마, 시집가도 되겠네”하자, 눈을 지그시 감은채 고개를 저었다. 대학생이 된 손주를 보자, 엷은 미소까지 지으셨다. “바쁜데 왜 왔어”라며 찡그린 표정으로 핀잔을 주셨다. 아직 음식을 드시지는 못하지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 현실에 너무 기뻤다. 두시간여 동안의 병문안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노래마을의 ‘어머니’란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차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그리운 어머니...(중략)이 바람속 아무데도 갈만한 곳이 없고/ 세상이 주어질수록 더욱 그리운 어머니/ 나는 무얼 이루려 이렇게 빠삐 살아 왔을까/ 멀리 바라 보아도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내 고단한 꿈속에 당신의 자장가 소리/어머니. 내 등뒤에 늘 말없이 서 계시는 아!아! 어머니” 

나는 불효자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고 “함께 밥 먹을수 있니”라는 어머니의 말에 ‘일 타령’을 했다. 어머니의 고통스런 모습을 접할 때는 잠시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남은 여생,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글을 쓰고 있는 내내 컴퓨터 화면속에서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눈가는 촉촉히 젖었다. 가슴이 먹먹해 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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