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이금진 作 / 열손가락 지문
[시가 있는 아침]이금진 作 / 열손가락 지문
  • 임영석
  • 승인 2020.11.22 1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손가락 지문

-이금진 作

 

골목길 안쪽에서 도장 파는 박씨 노인
돋보기 안경으로 훈민정음 자음과 모음
글자가 반듯하게 들어와 각과 각을 세우고

조각칼은 물푸레나무 속살을 밀어내어
나무심장을 터주고 나무 혈을 돌게 했다
일평생 나무의 결을
매만지며 살아 온 손

열손가락 지문이 음각된 쉼터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숲속향기가 흐르고
한 노인 그 숲속에서
나이테를 세고 있다

 

이금진 시조집 ‘꿈꾸는 봄날’, ‘동학사’에서

 

 

이금진 시인의 시조 ‘열 손가락 지문’에는 동화 같은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요즘은 많이 사라져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나무 목도장, 흔히 막도장이라 하여 싸인이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도장이 한 사람의 모습을 대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도장을 새기던 박씨 노인이 일생을 살아온 삶의 시간을 그려 놓은 동화 같은 작품이다. 지문처럼 음각과 양각을 나무에 새기며 삶의 숨결을 보듬었던 그 시간이 나무의 혈을 새롭게 돌게 했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었던 시절을 애틋하게 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매만지던 그 나무의 숲속이 박씨 노인의 가슴에 켜켜이 쌓여 그 나이테를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회양목이 되었건, 물푸레나무가 되었건, 조각칼로 지문이 닳도록 도장을 새기며 참으로 많은 사람의 삶의 이름을 새겼으리라. 그 이름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였던 사람들이다. 이제는 목도장을 새기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기계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도장을 새기는 시대다.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낙관을 돌에 새기는 전각을 하는 사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열 손가락 지문으로 세상을 지도처럼 이곳저곳 삶의 이름을 새겼던 세월만큼이나 그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옛 추억이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작품이다.

임영석 <시인·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