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드 스캇은 1799년에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노예로 살았고, 교육도 받은 적이 없어 글을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드레드 스캇과 그 부인 해리엇 스캇은 소장에도 서명을 하지 못하고 이름 대신 ‘X’ 표시를 하였고, 다른 사람이 드레드 스캇이 표시한 것이라는 뜻으로 ‘his mark’라고 부기해 놓았다. 드레드 스캇의 부인은 성도 없었기 때문에 ‘Harrietof color’라고 표시되어 있다. 당시 노예는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어 드레드 스캇의 성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연방대법원은 1857년 3월 6 일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하면서 스캇은 노예이고,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소송을 제기할 자격도 없다고 판결했다. 노예는 개인의 사유재산이이라고 한 이 판결은 노예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도 헌법 위반이라고 선언하였다. 11년에 걸친 재판에서 결국 드레드 스캇은 얻은 것이 없었다. 이러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지금까지도 가장 수치스런 판결로 여겨지고 있다. 이 판결은 결국 노예의 주인인 에머슨 부인이 다시 결혼하면서 해결되었다. 새 남편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드레드 스캇 부부를 처음 주인인 블로우 가족에게 넘겨주었고, 블로우 부부는 스캇 부부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드레드 스캇은 1년 후인 1858년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 수치스런 판결은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을 일으킨 큰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 길거리에서 자신의 사진이 들어간 선거홍보물을 들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치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정치가가 되어서 국회의원, 시, 도의원이 되거나 시장, 군수가 되어 하고자 하는 일이 나중에 후배나 후손들로부터 욕을 먹거나 수치스런 일을 했다고 평가받을까 두렵지 않으세요?”
저작권자 © 원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