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보리밥 세 그릇
[안부를 묻다]보리밥 세 그릇
  • 임이송
  • 승인 2021.05.23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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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대학병원에서 정기검진이 있어 20시간을 금식했다. 검사가 끝나고 몹시 배가 고팠지만,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참고 왔다. 웬만해서는 병원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꽁보리밥이 먹고 싶어서였다. 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칼국수 집에 가면 칼국수가 나오기 전에 맛보기로 꽁보리밥을 준다. 그게 먹고 싶었다. 

크게 한 숟갈 정도의 꽁보리밥에 쫑쫑 선 열무김치와 간장과 참기름을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게 전부다. 그런데 그게 맛있다. 분명 칼국수를 하나 시켰는데 보리밥이 두 공기가 나왔다. 배가 너무 고파 한 공기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 주인에게 하나가 더 왔다는 걸 알려 줬다. 두 사람인 줄 알고 잘못 갖다 놓은 게 분명했다. 당연히 도로 가져갈 줄 알았는데 주인은 나에게 그걸 먹으라고 했다.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두 공기를 비우고 나니 더 감질났다. 말이 두 공기지 두 숟가락밖에 안 되는 양이다. 나는 주인에게 밥값을 치를 테니, 제대로 된 한 공기를 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은 앞서 두 공기보다 더 많은 양을 갖다 주며 그냥 먹으라고 했다. 그것마저 먹고 나니 허기가 채워졌다. 대신 칼국수는 반이나 남겼다. 계산을 하면서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서울 한복판, 그것도 강남에서 그런 후한 인심을 만날 줄은 몰랐다. 포만감과 함께 서울행이 모처럼 즐거웠다. 검사를 받느라 긴장했던 몸과 마음도 어느새 느른해져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집안 사정이 급격이 나빠진 적이 있었다. 그땐 하루에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버거웠다. 그 무렵,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근처 친척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한여름이었다. 그 집 아이들은 참외를 한 바가지 씻어 껍질째 베물어 먹고 있었다. 아무리 있어도 누구 하나 먹어보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껍질이 연한 참외는 깎지 않고 먹는다.

고3 학력고사가 있던 날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수능한파가 닥쳤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2 때부터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 되니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장학생으로 갈 생각으로 죽어라 공부했다. 시험이 있던 날 아침,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공부하지 말라는 걸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아서 서운했다. 집을 나서는 나에게 아버지는 점심시간에 교문 앞으로 나와 있으라고 했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나는 시험시간 내내 궁금했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다른 수험생들은 교실에서 보온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는데, 나만 도시락이 없었다. 속상한 마음으로 교문으로 나가니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도 사준 적이 없는데 왜 나오라고 했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낯선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 문간방 부엌에서 아버지가 점심을 짓고 있었다. 쇠고기 뭇국과 자반고등어 구이와 냄비 밥을. 나를 위해 그날 하루 문간방을 빌렸다며. 나는 그날 전국의 수험생들 중 가장 따뜻한 점심을 먹었다. 어쩌면 지금껏 먹은 밥 중에서 그날 먹은 밥이 제일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수능 날만 되면 낯선 문간방과 그 이듬해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른이 되고나서부터 나는 세상의 어떤 인심보다 밥 인심을 최고로 친다. 그래서 귀한 사람일수록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 해마다 아버지 제삿날이면 나는 손이 가장 많이 가는 나물을 해간다. 음식은 정성이 들어간다. 정성은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 시간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기억으로,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간직하게 된다. 그 사람과 함께. 

다음 주에 사촌오빠 부부가 우리 집에 온다. 우리 부부의 연을 맺어준 사람이다. 내일부터 오이소박이를 담고 열무 물김치를 담고 갖은 봄나물로 그들을 맞을 생각이다. 원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배시시 터져 나왔다. 보리밥 세 그릇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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