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르신의 여명(餘命), 채색이 필요해
[기고] 어르신의 여명(餘命), 채색이 필요해
  • 전봉안
  • 승인 2021.08.01 03: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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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안 [원주보훈요양원 원장]
△전봉안 [원주보훈요양원 원장]

“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디 거름도 안주고 옥수수가 나를 먹을 수 있나 하겄다.”

케어팜이 진행되는 원주보훈요양원 텃밭 풍경이다. “염소뿔도 녹는다”는 대서! 모종값은 볼거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던 그 옥수수가 드디어 야외마당 어르신들 간식으로 차지게 올라왔다. 옥수수는 결국 어르신들의 훈계를 들으며 자란 것이다.

“혐오시설이다.”, “길거리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요양원에는 안 간다.”, “부모를 요양원에 보낸 불효자.” 우리나라 노인요양시설 4,000개 시대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국민적 인식을 바꾸어 놓을만한 선도적인 시설을 만들 수는 없을까.

지난 2016년 7월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선진 유럽 3개국 치매 서비스 현장 탐방길에 올랐다. 원주혁신도시에 들어설 원주보훈요양원을 명품으로 만들기 위한 여정이다. 건물 설계나 운영에 녹여낼 만한 인상 깊은 모습들을 담아왔다.

프랑스는 문화강국답게 역사적, 종교적 유산을 오롯이 살려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파리의 앵발리드 보훈병원과 요양원은 상이용사 보호, 부상군인 치료, 테러희생 민간인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 운영하는 대통령직속 국가기관이다. 350년 전 건립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으며, 역사적 교훈을 전하고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중앙 건물에 나폴레옹 무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성모발현의 도시 프랑스 루르드는 인도와 차도의 경계석이 없다. 모든 길은 휠체어가 먼저다. 단기보호시설인 아케일 노트르담은 중증과 경증 환자 공간을 분리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옥상과 창문을 통해 1877년 건축된 로사리오 성당을 강건너로 조망하며 영적 지지를 도모할 수 있도록 했다.

벨기에 성모니크 요양원은 옛 수도원 건물과 지형지물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만들어진 자연친화적 시설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을 시설 운영의 핵심가치로 두고 있어 모든 침실이 1인실이고, 과거 집에서 사용하던 옷장, 흔들의자, 소장품은 물론 애완동물 사육도 가능하다. 또한 가족 및 친구와 교감을 나눌 수 있도록 파티나 면회가 자유롭게 허용된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장기요양보험’을 시행한 국가인만큼 선진적 시스템을 자랑한다. 특히, 호그백 치매마을 요양원은 환자와 의료진이 함께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개방적 공동체다. “위험도 인생의 일부이며, 입소자들을 방에 가둬놓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치매에 대한 호그백의 정신에 주목했다.

마을 바깥은 성벽처럼 둘러쳐 있지만 마을 안에서는 과거 비슷한 직업을 가진 7명 내외의 사람들끼리 한집을 구성하며 생활한다. 마트에 들려 물건을 사는 사람, 휠체어에 앉아 한참 동안 풀꽃에 심취해 보는 사람 모두가 치매환자다. 종사자들은 개입하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케어를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환경은 결과적으로 안전을 이유로 통제하는 시설보다 약물 복용량이 줄고 더 안전하며 장수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부지 9,784㎡(2,960평), 입소정원 200명 규모로 개원한 원주보훈요양원의 정신은 휴머니튜드 케어다. 폐쇄적·강제적 환자관점 돌봄이 아닌 개방적·자율적 사람관점 돌봄을 지향한다. 우리나라 요양원들의 폐쇄성을 극복하고자 휠체어경사로, 에코트리움, 테라스, 로비중정, 침실개별창, 면회실 폴딩 도어 설치 등 오픈형 공간을 설계에 반영했다.

또한, 자연마당(텃밭), 힐링마당(꽃밭), 웰컴마당(간판석)을 조성하여 일상적으로 이용토록 했다. 동질적 직업이나 취미를 가진 어르신들을 같은 마을에 배정하고, 상급침실은 손때 묻은 가구 반입이 가능토록 허용한다. 매일 오후 2시 전후 자연마당에서 다양한 케어팜 활동이 이루어진다. 야외 스피커에서는 트로트, 가곡, 동요, 민요,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어르신들은 장터요리를 즐기며 철마다 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한다.

“매일 바깥바람 쐬어서 좋아. 이제 다른데 안가고 남은 여생을 여기서 마치고 싶어.” 방문 가정간호사가 어느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라며 귀띔해 주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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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용 2021-08-08 09:46:43
몇년전 아버지께서 원주보훈요양원 착공기념식에 초대받아 참석하셨습니다. 지난해말 준공소식을 들으시고 든든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소하여야하는 상황이 되자 망설이셨고 입소 초반에 가족이 그리워 힘들어 하셨습니다.

두달이 채 안된 지금, 예전보다 강해 지신 아버지의 모습을 밴드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원장님과 직원분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는 직원분들.. 원주에 이렇게 훌륭한 곳이 있다니 자랑스럽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가 자유롭지 못한것입니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어르신이 언제든 가족을 만날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원장님과 직원분들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명옥(이동훈어르신딸) 2021-08-06 14:11:31
노인 복지의 선진국인 유럽 3개국 탐방 결과를 토대로 요양원 운영에 대한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신 원장님의 기고 글을 통해 우리나라의 노인 복지에 시설
운영에 대한 희망을 갖을 수 있었습니다.
원장님이 서두에 말씀하신 대로 부모님을 요양원에 맡긴 죄스러움과 상처 받았을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며 수시로 눈물을 훔쳐야했습니다.
이제 한달이 되어 가는데 저희 형제는 지금도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주보훈요양원의 시설이나 그동안 접했던 복지사님, 간호사님, 요양사님들을 통해 조금씩 마음이 놓이고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비록 영상을 통해서 만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빛이 잘드는 방, 건물을 둘러싼 자연환경, 넓은 텃밭, 매일 2시면 벌어지는 특별행사 등.
본 요양원이 전국 제일의 요양원으로 우뚝서길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