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학교에서 ‘합창 교향곡’을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합창 지도를 맡으신 나영수 교수님(당시 국립 합창단 상임 지휘자, 한양대 교수)은 이 곡을 그냥 ‘Nine Symphony’라 부르셨는데, 어린 마음에 ‘아니, 9번 교향곡을 쓴 작곡가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그냥 나인 심포니라고만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곡을 분석하거나 일련번호로 되어 있는 곡목을 언급할 때, 작곡가 이름이 없으면 의례히 ‘베토벤’ 작품이라는 것으로, 이는 ‘베토벤’이라는 이름의 권위와 위엄을 웅변해 주는 일종의 ‘관습’이다. 예를 들어 ‘14번 소나타’ 하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뜻하는 것.

복학생 시절 모 음악 단체에서 실시된 여름 음악 캠프에서 어느 교수님께서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대한 강연을 하셨는데, 4악장 해설 부분에서 깜짝 놀랄 단어가 등장한다.
“동무들! 이런 소리가 아니오”
아니, ‘동무들’이라는 말은 북한에서 쓰는 단어 아닌가?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이내 ‘어깨동무’라는 소년 잡지를 생각한 후 평정심을 되찾았다.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가 내 안에도 이렇게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니…
오케스트라로 들려 줄 수 있는 사운드의 가능성을 두루 선보인 후, 베이스 독창자가 외친 한 마디는 바로 “O freunde, nicht diese Töne”다.

https://youtu.be/KD8ti2Eaqgk?t=360
(베이스 솔로 부분)

이 외침은 ‘교향곡’에서는 처음으로 ‘인성(人聲)’이 합류하게 된 4악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사다.
참고로 가사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축약해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동무들! 이런 음악 말고 좀 더 즐겁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중략)
“만민들이여, 만물들이여…
우주 저 편에 우리의 아버지(창조주)가 살고 계신다.
그대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있는가? 그 분을 찾으라!”

이 가사는 ‘실러(1749-1805)’가 쓴 시인데, 그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 군주제 때문에 힘들어 했고, 이 시에는 그의 미래 지향적 염원을 담았는데, ‘인류애’와 ‘인간의 해방’을 노래하는 내용이었다.

베토벤과 실러의 시대에 전 유럽을 강타한 대사건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으며, 실러의 이 시는 프랑스 혁명 직전에 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시는 당시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를 베토벤이 놓칠 리가 없다.

베토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장르가 바로 ‘교향곡’이었고,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4악장에 실러의 시가 결합을 하니, 인간의 시련과 한계를 초월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곡을 쓰던 당시, 베토벤의 청력은 완전히 무너졌고, 가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청력을 잃었으니 이 곡의 초연도 다른 사람의 지휘로 이루어졌다(1824년).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음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 베토벤의 옷소매를 출연진이 잡아 이끌어 청중석을 보여 줬고, 그제서야 베토벤은 청중들의 환호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Nine Symphony’ 발표 이후 베토벤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어 결국 1827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무려 2만여 명의 빈 시민들이 베토벤의 죽음을 애도했다.

베토벤은 청력 이외에도 안구 통증과 복통, 관절염 등 평생을 지병에 시달리며 철저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음악을 만들어 낸 전사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난과 역경을 딛고서 ‘합창 교향곡’과 같은 인류 문화 최고의 걸작을 남긴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경의를 표한다.

https://youtu.be/KD8ti2Eaqgk?t=746
(합창 나오는 하이라이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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