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추억 라면
[기고] 추억 라면
  • 최원선
  • 승인 2021.09.1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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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선 [원주플라워뱅크 대표]
△최원선 [원주플라워뱅크 대표]

온 천하가 가을색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다. 추위를 뚫고 삐죽이 나온 잡초들이 발등에 채이고, 라일락 꽃향기가 콧등을 간지럽힐 때 큰 숨 들이켜고 묵은 탄소를 내뿜으며 봄을 노래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무화과 익어가는 변화에 감사하고 감나무 가지가 굽어지고 곧 노랗게 변해갈 은행잎에 가슴이 설렌다.

가을비가 며칠 째 오락가락 하여 기분도 그렇고 오늘은 걸어서 출근하자 생각하여 좀 더 바쁜 아침시간을 채웠다. 냉장고에 꽁꽁 모아둔 옥수수를 간식으로 준비해 건강한 출근, 착한근무를 하던 중 옥수수와 커피로 오전 에너지를 채웠으나, 늦은 점심메뉴로 수제비가 먹고 싶은 생각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콧노래도 짧게 짧게 흘러나왔고 감자 두개를 깎아 나박나박 썰어 넣고, 끓는 동안 라면을 꺼냈다. 앗! 라면을 꺼냈는데 30년 전 추억 속 그 라면이 보이네?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치마, 연 핑크 블라우스 등 뒤로 흘러넘치는 구불 긴 머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미소까지…사무실 형광등을 안 켜도 눈이 부시다”는 직장상사의 칭찬에 딸랑 셋인 여직원들의 팀 단합은 기가 막혔다.

어느 날 오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외근으로 사무실을 비우고 출장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수다스런 동행이 시작되었고, 일상의 수다 속에서도 약간의 업무 룰이 섞여 적절히 믹스되는 조화로움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사실 팀 출장은 일상탈환 같은 즐거움이 있으므로 늘 반갑다. “최00양, 회사에서 전화 왔네. 전화 받아요”, “네~전화 바꿨습니다. 네~ 5시쯤 복귀 가능합니다. 시간 맞추어 들어가겠습니다”.

곧 하루일과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 우리 수다 속의 화제거리는 아침 때와는 달리 ‘신속 귀가’와 ‘아이쇼핑’으로 바뀌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사무실까지 가는 거리가 평상시의 3배로 느껴졌다. 사무실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사무실 문 언저리에 누군가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갔다를 몇 차례 하는 것을 눈치 채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앗! 사무실 소장님께서 라면을 한 솥 끓이고 계셨다. 버스 안에서 나눈 아이쇼핑 계획이 무산되고 서로 눈망울을 돌리며 자리에 앉기도 전, 소장님의 부산스럽고 독촉하는 음성은 손을 씻을 시간도 허락지 않았다.

“야~ 야~ 이 라면은 불어도 맛있어. 시간 맞춰 끓이느라 했는데 조금 아주 쪼금 불었다 그치?”라신다. (소장님의 모습은 얼굴은 불그스레한 모습이나 눈빛은 익살스럽고, 목은 굵고 짧으시나 늘 칼라 깃 세우는 걸 좋아하시고, 배는 많이 나오셨고 전체적으로 술고래 아저씨 스타일이시다) 조금 불은 정도가 아니었다.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될 정도로 면들이 서로 착착 엉겨 붙었다.

우리는 아이쇼핑의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의 아침수다를 다시 이어갔다. 라면은 불어도 맛있고, 소장님의 급한 성질 속에 숨어있는 자상함은 일품이다. 흔하디흔한 라면이지만 추억 속 라면에는 젊은 날의 의미가 들어 있다.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경계(警戒)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경험 속에 지나오는 매 순간들에 스승이 함께 했었다는 감사함이 있다.

태풍, 뜨거운 태양, 모진 바람 이겨내고 붉어지는 대추처럼 여러 해 삶의 경험들에 의해서 영글어 가는 내 인생을 토닥토닥 응원하며, 30년 전 추억 속 라면 덕분에 알맞게 익어가든, 부족해서 처져있든 현실의 내 인생에 계란하나 탁!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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