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기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최광익
  • 승인 2021.12.1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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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 교장]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 교장]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 세계의 불평등은 어디에서 오며 그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2012년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공동 집필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라는 책은 방대한 자료 분석을 토대로 이 질문에 명료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의 주장은 명료하다: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 이러한 주장의 예로 저자들은 남한과 북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걸쳐있는 노갈레스라는 도시를 들고 있다. 이들 지역의 빈부격차는 오로지 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들의 통찰이 놀라운 것은 기존의 빈부 발생에 대한 이론의 허구를 지적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왜 계속 가난한가에 대한 예리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빈부 발생에 관한 지리적 위치가설(georaphy hypothesis)에 따르면, 빈부격차는 국가의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열대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호기심이 부족하며, 그 결과 일을 하지 않고 혁신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이다. 한편 무지 가설(ignorance hypothesis)에 따르면, 국가의 가난은 그 나라의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빈부의 근본 원인이 국가의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착취적 경제 제도를 택하고 있으며, 이들 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소수 엘리트들은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cution)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적 파괴는 부와 소득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도 재분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빈부를 가르는 ‘착취적 경제 제도(extractive economic system)’와 ‘포용적 경제 제도(inclusive economic system)’의 본질은 무엇인가? ‘착취적 경제 제도‘는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사유재산권을 보장하지 않고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제도이다. 반면 ‘포용적 경제 제도’는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며, 신기술과 기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제도이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두 가지 경제 제도 배후에는 상응하는 정치제도가 존재한다. 요컨대 ‘착취적 정치제도’ 아래에서는 소수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 착취한 자원을 이용해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간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다원주의적 정치 권력을 고루 분배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할 수 있도록 일정 수준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하며 안정적인 사유재산권의 토대를 마련하여 포용적 시장경제를 뿌리내리게 한다.

그렇다면 모든 국가가 잘 살기 위해서는 포용적인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한 포용적인 경제 제도를 운영하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독일의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말하는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으로, 새로운 인물이 착취적 제도를 틀어쥐고 있던 정권을 전복한다 해도, 그들 또한 사악한 착취적 제도를 이용해 착취를 일삼으며 주인 노릇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정치 권력의 속성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민주화 운동에 전념했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은 후 국민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다 몰락한 경우가 한 예가 될 것이다. 

결국 국가의 빈곤은 어느 날 갑자기 포용적인 집단이 권력을 잡아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우리 사회가 더 다원화되고, 다원화된 집단 간의 광범위한 연합이 이루어져 착취적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최근 강원교육의 실패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몇몇 사람들이 도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결정해서 학교를 옥죄는 현실은 이 책의 문제 제기와 상통한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이 오직 선거뿐이라는 현실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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