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4월 18일 처음 열리는 원주옻역사전시회
[기고]4월 18일 처음 열리는 원주옻역사전시회
  • 김대중
  • 승인 2022.04.1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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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언론인)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이달 18일부터 석 달 동안 원주옻칠기공예관에서 사상 처음으로 원주옻역사전시회가 열린다. 일제강점기에서 1980년까지의 옻역사전시회는 전국에서도 처음이다.

이번 전시회를 여는 이유가 있다. 원주옻의 품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원주보다도 밖에서 더 유명할 정도로 원주를 상징한다. 

그런데 대부분 원주옻의 명성이 품질에서만 온 것으로 알고 있다. 큰 오산이다. 그 정도였다면 쌀로 유명한 여주 쌀, 철원 쌀 정도에 그칠 수 있다. 그렇게 됐으면 원주옻의 명성도 가치도 반감됐을 것이다. 겨우 품질 좋은 옻칠의 산지로나 얻은 명성을 울궈먹는 도시였을 것이다. 원주가 왜 대한민국 옻칠문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인지, 그 위상과 가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개최 이유다.

우리 조상들은 원주옻의 품질의 우수함을 몰랐다. 알았다는 역사적 자료를 아직까지 못 보았다. 슬프게도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일제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때 옻칠이 절실했던 일본인들이 전국적으로 식생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밝혀졌다. 일본은 자타가 인정하는 옻의 종주국으로 나라 이름까지 소문자 영어명 japan이 ‘옻칠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나라다.

원주옻의 품질이 평북 태천 다음으로 뛰어난 사실이 확인된 후 원주에서 생산된 옻칠은 전량 공출됐다. 모두 군수물자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원주옻의 품질은 이렇게 널리 알려지면서 원주옻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된 원주옻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한국전쟁 후 폐허위에서다.

도시가 완전히 잿더미가 된 원주는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원주의 앞날을 걱정하던 뜻있는 유지 7명이 힘을 모았다. 고민 끝에 원주의 미래를 먹여 살릴 것은 옻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인정받은 원주옻이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원주옻을 원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산업으로 키우기로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이하 칠공예회사)다. 그 회사 건물이 1957년 1월 태장 1동 사무소 뒤편 2,000여 평의 부지에 준공되면서 옻칠을 산업화 하기위한 민간기업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된 것이다.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유일한 옻칠전문 기업이다.

치악산 금대리 일대 국공유지 108만 평을 임대해 대대적으로 옻나무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인부가 많은 날은 하루 120명까지 동원됐다. 회사에는 칠정제부, 칠공예부, 페인트부 등 3개 부서를 두었다. 일사 김봉룡 선생을 모셔오면서 전국에서 간판급 칠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직원들도 30여 명이 됐다. 당시 상황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기업체였다.

전쟁이 끝난 후 옻칠문화의 암흑기를 맞은 대한민국에서 칠공예회사는 유일한 옻칠역사의 상징이 됐다. 원주란 땅이 그 역할을 했고 원주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세계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무리하게 자본을 투자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맞아 주인이 바뀌는 등 어려움 끝에 1981년에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미완의 꿈이 됐지만,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옻칠로 원주의 미래를 열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실로 대단하다. 혁명적 도전이었다.

이번 전시회의 시간적 공간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80년까지이다. 그중 핵심은 옻칠로 원주의 미래를 꿈꾸던 칠공예회사의 당시 자료 사진을 토대로 개최한다. 칠공예회사 건물은 물론 옻나무 육묘장, 치악산 일대의 옻나무 조림 작업 등의 사진을 통해 그때 상황을 실감하게 해준다. 칠정제부의 정제 작업, 1968년 시공관에서 열린 일사 김봉룡 선생의 전시회 등의 사진 20여 점이 전시된다. 여기에 원주옻의 역사를 스토리로 가미했다. 유물로는 50년 된 원주옻칠 원액과 칠 채취 도구 등이 선보인다.

가슴 아픈 일은 그 건물이 엄청난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빨래방과 해장국집이 됐다는 사실이다. 지금 원주의 모습이다. 전통이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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