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생각 다이어트
[비로봉에서] 생각 다이어트
  • 심규정
  • 승인 2022.04.2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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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오늘도 입맞춤을 위해 집을 나선다. 장소는 조용하지만, 사람들이 쉴새 없이 오가는 혁신도시 수변공원. 두 발과 대지와의 딥키스랄까. 가장 훌륭한 유산소 운동인 걷기다. 겨우내 잠시 중단했다 봄바람이 불면서 많게는 아침 저녁으로 두 번, 적게는 한 번,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가. 걷다보면 같은 시간, 비슷한 장소에 꼭 만나는 걷기 열혈 마니아가 있다. 두 부부 이야기다. 항상 50cm거리를 두고 마치 바늘과 실처럼 꼭 붙어서 허우적 걷는 모습, 아기자기한 대화까지. ‘부부는 닮는다’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며칠 뒤 부부는 천만뜻밖의 남남 같아 보였다. 4~5m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이런 낯선 광경을 처음 접한지라 궁금증이 더해졌다. ‘한 쪽이 몸이 아프신가’, ‘부부 싸움했나’, ‘서로 생각이 많다보니 잠시 보폭을 잃은 걸까’ 온갖 생각이 잠시 머리를 감쌌다.

그런데 하루 뒤 반전이 일어났다. 두 부부는 여느 때와 똑같이 다정다감하게 꼭 붙어서 걷고 있었다. 마치 ‘우리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일랑 하지 말게’라고 말하는 것처럼. 집으로 향하면서 ‘내가 왜 쓸데 없는 생각을 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가’라고 생각했다.

캐나다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니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미래에 대한 인간의 염려증을 소개했다. 우리가 하는 염려 중 실제 일어나는 것은 4%에 불과하고, 96%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거나 이미 일어난 일, 사소한 일,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라고 분석했다.

세계적인 수필가이자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도 “인간들은 일어난 일 때문에 상처를 입기보다 일어날 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더 상처를 받는다”라고 진단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는 생각 과잉의 삶을 살고 있다. 상대방의 사소한 말을 확대 해석해서 근심 걱정에 빠지거나 추리소설 작가처럼 상상의 나래를 과도하게 펼쳐 우리의 뇌를 혹사시킨다.

걷기 운동이 막바지에 다다랄 즈음, 무선 이어폰을 타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건 니 생각이고」가 흘러나온다. “(중략)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아니잖아/그냥 니 갈 길 가/이 사람 저 사람/이러쿵 저러쿵/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해도/상관 말고/그냥 니 갈 길 가/미주알 고주알/친절히 설명을/조곤 조곤 조곤 조곤 조곤 조곤 해도/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말해버려/그건 니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씩씩한 척하며 제 갈 길 가자는 의미를 지낸 노랫말이다.

시인 박노해는 ‘생각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차원이고 생각의 방향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많은 만남보다 속 깊은 만남을 강조했다. 잡념(雜念), 사념(邪念)의 대부분은 얼기설기 엮여진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만큼 복잡다단한 사람과의 관계망도 적절한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머릿속에 부유하거나 널을 뛰는 잡념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해서 심리적 방황을 부추긴다. 생각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청심(淸心)을 유지하는 것이 프레시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일의 걷기는 더욱 가볍고 리듬감 있게 펼쳐지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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