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도 수행이다.
[살며 사랑하며]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도 수행이다.
  • 임길자
  • 승인 2022.10.02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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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하늘이 멋진 계절이다. 길을 가며 이 계절이 선물한 느낌 좋은 바람과 입을 맞춘다. 부산한 일상을 잠시 하늘에 맡기고 곁을 떠도는 구름과 우정을 나누며 코스모스 길을 걸었다. 3년 전 이맘때 건강이 녹록지 않은 그녀(당시 나이 85세)가 정토마을에 입소했다. 인지 상태는 명료하지만 무릎 관절이 노화되어 누군가의 부분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녀를 시설에 모시고 온 사람은 가족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가족이 없었다. 우린 그녀를 어머니를 불렀다. 그녀는 19살에 어느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아이가 생기질 않아 시댁을 나왔단다. 그 후 그녀는 어느 사찰(절)에서 공양주(절에서 밥 짓는 사람)로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 절 앞에 두고 간 세 살배기 남자아이를 키우면서 20년을 그렇게 살았단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를 그녀와 그 절의 스님들은 성심을 다해 키웠다. 그 덕분에 아이는 사회생활이 가능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 아이를 제 아들이라 여겼고, 그 아이도 그녀를 ‘엄마’라 불렀다. 그녀가 시설에 입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대면 면회가 어려워졌다. 그녀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 아들을 늘 그리워했고 많이 기다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안 오는 아들을 원망도 했다가, 걱정도 했다가, 불편해진 심기를 어찌하지 못해 화를 내기도 하고, 식사를 거부하기도 하는 등 보통의 여느 어머니였다. 

그녀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 하늘에 바다가 생긴 듯한, 구름 한 점 없는, 눈이 시리도록 부신 날. 그녀는 고단했던 삶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떠나기 10일 전 그녀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한밤중에 병원에서 운명했으니 의료진 외에 아무도 그의 임종을 살피지 못했다.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병원으로 가서 빈소를 마련했다.

가족들이 없는데 빈소를 마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내가 부여하면 된다. 그녀의 영정사진을 준비하고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사진을 중심으로 양쪽을 꽃으로 꾸미고 제단(祭壇)을 마련했다. 첫째 날엔 우리 법인의 대표이신 현각스님께서 성심을 다해 그녀의 극락왕생(極樂往生) 빌어 주었고, 그녀를 시설에 모시도록 도와주신 대이스님께서 이틀간 그녀의 불편했던 지난 삶을 위로하며 영면을 기원했다.

오래전 절에서 만났다는 지인들이 소식을 듣고 간간이 방문해 주었고, 그녀가 키웠던 아이도 빈소를 지켰다. 그녀를 직접 보살폈던 시설 직원들도 틈틈이 가족들처럼 조문해 주었고, 장례식장 관계자들도 마음을 보태주었으니 사흘 간 그녀의 빈소에서는 촛불과 향이 꺼지지 않았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지난 15년간의 급한 걸음들을 돌아보았다. 매 순간 주어진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애를 쓰지만, 결과에만 집중된 현실이 늘 답답하고 힘겨웠다. 노인복지 현장은 언제나 우리들의 훌륭한 학습장이고, 어르신들의 과거는 언제나 우리들의 현재임을 알아차리게 하니 어찌 소홀할 수 있었으랴... 경험해보지 않는 늙음을 우리는 어르신의 눈과 입을 통해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고, 어르신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 설계도에 색을 입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생이란 건물에 성숙한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건 순전히 지금 나의 몫이다. 

이번에 그녀를 보내는 과정에서 나의 판단과 행동은 생각하기에 따라 무모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과에 대한 평가 또한 각기 다를 것이다.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도 수행이라 했다. 자태가 곱고, 언어가 따뜻했던 그녀가 지금쯤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지? 코스모스 길 어디쯤을 걷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순 없지만 착한 기운들이 배웅했음을 알리며, 원주신문 독자들 모두 이 계절이 보내주는 축전(낙엽)에 친절한 사연 담아 온기(溫氣) 나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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