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의 문화 동행자, 칠예가 전용복
[기고]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의 문화 동행자, 칠예가 전용복
  • 김대중
  • 승인 2022.11.13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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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언론인)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지난 2월 ‘시대의 지성’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영면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선생의 생애 마지막 TV조선 인터뷰가 방송됐다. 이어령 선생은 전쟁, 언어, 문화의 벽을 넘은 과정에서 겪은 깨달음을 전했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와 함께했던 동행자들 덕분이라고 했다. 고인과 동시대에서 호흡하며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풍미했던 산증인들이다. 

화가 김병종,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국악인 안숙선, 시인 오탁번,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김화영,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 연출자 표재순, 칠예가 전용복 등이 그 주인공이다. 선생이 생전에 직접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했던 그의 동행자들이다. 이어령 선생은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로 불렸다. 문학·음악·미술·건축 등 분야를 넘나들며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가들의 선배였다. 

7명의 이름 가운데 가장 반가우면서도 나를 부끄럽게 한 이름이 바로 칠예가(漆禮家) 전용복 선생이다. 왜 전용복 선생에 대해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이어령 선생께서 전 선생과 가까운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2010 년도에 출간된 전 선생의 저서 ‘한국인 전용복’에 추천사를 주셨다. 

이어령 선생의 특별한 추천사 내용이 기억난다. “지금도 메구로가조엔에서의 하루를 잊을 수가 없다. 온통 그 관내 전체가 마치 전용복의 전시장처럼 아름다운 칠공예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략)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한 탐스러운 결실은 일본으로 세계로 가지를 뻗는 한국 칠공예의 긍지이며 희망이다”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를 지금부터 하겠다. 지면상 팩트만 정리하겠다. 전 선생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태어나 미술을 전공했다. 80년대 일본 도쿄의 국보급 연회시설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미술품 복원 공사를 치열한 경쟁에서 따내 완성하면서 세계적인 옻칠 스타 작가가 됐다. 총공사비 1조 원에 수 천 점의 옻칠작품뿐만 아니라 나전옻칠엘리베이터 34대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 설치했다. 옻칠작품의 3분의 2는 창작품이다.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할 무렵 그는 원주시의 초빙을 받았다. 당시 원주시장은 전 선생에게 1만 평에 미술관 등을 짓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부지는 문막읍 화훼단지였다. 전 선생은 원주로 이전했고, 시에서는 우선 상지영서대 전통산업진흥센터를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전 선생은 전통산업진흥센터에 4개의 작업공간을 사용했다. 부산에서 대학원생들이 와서 옻칠을 배웠다. 그런데 화훼단지 조성사업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인지, 약속은 없었던 일이 됐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고 실무까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크게 실망한 채 지난 2018년 그는 독일계 다국적 엘리베이터 제조사인 TK 엘리베이터서와 나전옻칠엘리베이터를 만들기로 계약하고 한국 본사가 있는 천안으로 떠났다. 노하우가 있었기에 반자동화 기술과 장비의 개발로 쉽게 양산에 성공했다. 대박 아이템이 됐다. 

지난 5월 12일 200평 규모의 옻칠연구소 겸 작업장을 미술관으로 바꾼 개관식에서 서득현 대표는 전 선생을 “디자이너며 혁신가며 크리에이터”라고 표현했다. 미술관 이름이 ‘전용복 옻칠과 함께 노는 곳’이다. ‘핫플’이 됐다. 인재 한 명이 몇십 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원주는 그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대해 전혀 몰랐다. 무지의 죄다. 무지하면 인재도 알아보지 못하니 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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