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조선시대 ‘괘서’...원주시청에서 환생하다
[비로봉에서] 조선시대 ‘괘서’...원주시청에서 환생하다
  • 심규정
  • 승인 2022.12.1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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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 사이에 위화감 조성, 갈등 조장, 팀워크 저해는 물론 이게 굳은살처럼 굳어지면 조직문화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불신은 결국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TV 드라마 사극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성문, 관청의 문루, 저잣거리 등 특정한 장소에 백성들이 모여 무언가를 읽고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웅성한다. 잠시 후 군졸들이 몰려와 모두 해산시킨다. 내걸린 건 이른바 괘서(掛書) 혹은 벽서(壁書)라 부른다. 지금은 이를 통칭해 익명서라고도 한다. 

괘서는 조선 후기 민중언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의사표현 통로가 극히 제한적인 당시 상황에서 민심이 흉흉할 때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정부 관리나 정책의 비판, 외부의 침략 또는 난의 발생을 예언하거나 난을 선동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요즘 SNS, 우편 배달체계가 괘서와 다수를 잇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슈퍼 전파자처럼. 최근 익명의 괘서가 원주시청 각 부서, 읍면동에 우편으로 배달돼 원주시를 발탁 뒤집어 놓았다. A4용지 2장 분량의 이 괘서에는 소위 원강수 시장 지근거리에 있는 공무원 또는 측근 7~8명의 추문(醜聞)이 담겨있다. 

내용을 이렇다. 가족이나 친척이 식당, 꽃집을 운영해 성업 중이었다거나 부인이 고가의 물품을 판매해 재미를 봤다거나 사생활이 어쩌고저쩌고했다거나 인사나 이권에 개입했다거나 등등. 일부는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먼 내용도 있지만, 사실관계에 꽤 기초하고 있다.  

공직사회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알음알음 전해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다. 좀 더 구체화하여 몰랐던 부분을 새로 아는 내용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내용은 직업윤리 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범죄 구성 요건에 맞지 않아 보인다. 주변에서는 “일종의 망신주기식 퍼포먼스 아니냐”란 말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이 괘서의 작성자를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고소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괘서는 당사자들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어 공직 내부를 현미경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문장력까지 갖춰 과연 익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시설직 20년 차 주무관이라고 밝혔을 뿐, 본인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일부에서는 인사에서 소외된 행정직 공무원이 가면 뒤에 자신을 감췄을 것이라는 등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연말 송년 모임에 빈번해지는 요즘, 이만한 안줏감이 또 어딨을까.

이쯤 대면 괘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진다. 지난 10월 중순 단행된 원주시 인사에서는 국 축소(2개→1개) 등으로 기술직들이 부글부글 끓었던 터라 대체로 그 연장선에서 해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괘서 내용에도 나와 있지만, 전임 시장 때 잘 나가던 인사들이 시장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잘 나가는 현실에서 민선 8기는 뭔가 다르겠지라며 그간 기대를 하고 있던 직원들의 실망감이 커지면서 괘서 사건이 촉발됐다고 한 직원은 귀뜸했다.

물론 “당사자들의 업무 추진 능력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느냐. 능력이 있어서 발탁된 것 아니냐?”라며 그들을 감싸는 분위기도 있다. 괘서 사건은 벌써 공직사회를 거쳐 지역사회로까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다 제2의 괘서가 등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공직사회가 진흙탕에 내던져진 것 같은 작금의 이런 분위기는 심히 우려스럽다. 직원들 사이에 위화감 조성, 갈등 조장, 팀워크 저해는 물론 이게 굳은살처럼 굳어지면 조직문화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불신은 결국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지역의 미래를 위한 기획·연출자인 공직사회가 이래서는 정말 곤란하다. 그 피해는 그대로 시민에게 가닿을 수밖에 없다. 원강수 시장이 어떤 조직안정책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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