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최정란 作 / 독거소녀 삐삐
[시가 있는 아침] 최정란 作 / 독거소녀 삐삐
  • 원주신문
  • 승인 2023.01.08 2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거소녀 삐삐

최정란

 

 늦은 밤 골목을 돌며 논다 노인이 리어카를 끌며 논다 불 꺼진 빈 상자를 펼치며 납작납작 논다 비탈진 오르막을 밀며 비틀비틀 논다 노세 노세 노동요를 노새처럼 끌며 논다

 노래하는 새들이 노인을 놀리며 논다 밥이 노인을 차리며 논다 노는 입이 거미줄을 치며 논다 이 빠진 노래가 노인을 읊조리며 논다 흘러간 앨범 속 파노라마가 노인을 펼치며 논다 슬픈 일 기쁜 일 아픈 일이 노인을 논다

 시간과 잘 노는 사람, 시간을 잘 놀려야 하는 사람,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사람,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놀이를 하는 사람, 병과 정들어 병원놀이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 노을이 깊어 놀 일이 바쁜 사람

 노인이 가장 잘하는 놀이 기다리는 놀이, 기약 없이 하염없이 바쁜 놀이, 한가해서 더 바쁜 놀이, 노인이 논다 오지 않는 뼈와 살을 기다리며 논다 미처 오지 않은 먼 바깥을 기다리며 논다

최정란 시집 『독거소녀 삐삐』,《상상인》에서

요즘 우리 사회는 독거의 시대다. 혼자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도시화되어가고, 높은 빌딩의 주거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맞이해야 하는 고립의 시대다. 그러나 노는 방법, 사는 방법, 즐기는 방법, 이 모든 것들이 철저히 자기중심이고,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야 한다. 모더니즘적인 폐쇄의 공간을 자유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사회성에 대한 삶의 근원을 두고 최정란 시인은 삐삐라는 소녀를 대입시켜 말하고 있다. 세상은 더 폐쇄적이고, 더 고립적이고, 더 좁아지고 있다. 이러한 공간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흡수하여 세상이 삶을 유지시켜 나가고 있다. 어정쩡한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서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던한 삶도 아닌 노인들의 삶은 더 극명한 고립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고립의 모습을 놓고 바깥을 기다리며 있다고 말한다. 바깥은 그러나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니 내 뼈와 살은 외로움의 고립을 자처한다. 쭈글쭈글 주름진 우리들 세상의 삶의 길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4차선 또는 8차선 신호등에 파란 신호를 받고 달리고 있지만, 그 속도가 멈추고 차에서 내리면 갈 길이 그리 많지 않다. 걸어갈 길이 없는, 그저 차가 달리는 길만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이 걸을 수 없는 이 고립을 놀이라 한다면, 이는 아주 슬픈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