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우리에겐 ‘잠자리의 눈’을 가진 무당이 필요해
[비로봉에서] 우리에겐 ‘잠자리의 눈’을 가진 무당이 필요해
  • 심규정
  • 승인 2023.01.15 20: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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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편집장>
△심규정 <원주신문 편집장>

 

정치의 영역은 색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여야의 상징색에 따라 여당을 빨간당이라거나 야당을 파란당이라거나.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에 따라 무 자르듯 재단되는 일도양단(一刀兩斷)식의 흑백 논리에서는 회색분자가 자주 등장한다. 회색분자는 좋게 말하면 흑도 백도 아닌 중립론자나 신중론자를 말한다. 살짝 나쁜 의미로 보면 소속, 정치적 노선, 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몹시 나쁘게 말하면 이해득실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여의도 정치에서 자주 등장하는 색채와 관련된 표현은 또 있다. 파충류의 하나인 카멜레온(chameleon)은 빛의 강약과 온도, 감정의 변화 등에 따라 몸의 빛깔을 바꾸는 동물이다. 정치에서는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카멜레온 같은 사람은 진영을 떠나 상황에 따라 자신의 빛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처신한다. 미국에서 주목받는 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피터 홀린스는 책 「폴리매스는 타고 나는가」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폴리매스(polymath, 박식가, 융합형 인간)는 변화에 발맞춰 카멜레온처럼 능수능란하게 변신하고 유연하게 사고한다”라고. 

얼마 전 취임한 원주문화재단 박창호 대표이사의 취임사가 화제다. “저는 무당입니다. 칼춤을 추는 무당이 아니라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는 무당파(無黨派)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의사이자, 민선 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을 지낸 그는 지역에서는 빨간당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원강수 시장과도 꽤 가까운 인사로 알려졌다. 취임 몇 시간 전 그를 만나 취임사를 읽던 중 무당 이야기가 나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주변에서 진영논리에 따라 자신을 한쪽으로 치우친 인사로 분류하는 데 대한 불편한 속내를 의식한 표현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런 색깔론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시민들의 의식 저변에 견고하게 깔려 있다. 극단적 표현을 빌리면 “주파수가 달라. 조심해야 해”, “골수 △△당이야”, 심지어는 ‘〇〇분자’라는 극혐의 표현까지 등장한다. 필자도 색깔론을 비껴가지 못했다. 진보인사라느니 친 더불어민주당 인사라느니. 지방선거 이후 주로 현 여당인사들이 쳐놓은 인식의 그물망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이야기다.

어디 이뿐인가. 색깔론을 넘어 필자의 출신 고교를 빗대 ‘원주신문’을 ‘원고신문’이라고 비아냥대는 이야기가 시장 최측근 인사의 입에서 나오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지난해 10월 조직 개편에 따른 후속 인사를 비판하는 칼럼을 보도한 뒤 나온 반응이다. 비슷한 시기, 기사 댓글에는 ‘원고신문’ 앞에 강렬한 임팩트의 ‘좌파’란 딱지까지 떡하니 덧씌워졌다. “뭐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의 다양성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라며 속으로 삭였다.

지역발전과 시민의 복지를 위해, 지역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용맹정진해야 할 시점에서 색깔론이 무슨 대수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모든 기준을 색깔론, 진영논리에 근거해 네 편 내 편으로 접근하면 우물 안 개구리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점프 한 번 했다고 눈에 보이는게 없는 개구리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데, 주변에서 막무가내 안하무인격 군상을 자주 본다. 

유유상종, 즉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을 ‘찐친케미’라고 한다. 이런 끼리끼리 모이는 집단의 관계가 생각보다 매우 견고하고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크루문화’(crew)라고 하고,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고립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것을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反響室)라고 한다.

이러면 시민의 평균 눈높이와 유리되고 편벽(偏僻)·편재(偏在)된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반향실의 방음벽을 두텁게 쌓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태산같다. 이념의 저장탑 안에서 허우적거릴 시간이 없다. 이념적 맹신에 빠져 이념의 투사가 되느냐, 아니면 폴리매스가 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지금 색깔론에 그러데이션(gradation, 색조, 명암, 질감)을 가미할 때다. 수백만 개의 볼록한 겹눈 구조로 360도를 볼 수 있는 잠자리의 눈처럼 더욱 넓은 시야각이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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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천 2023-01-23 09:59:10
지지 정당을 떠나서 속 시원한 이런 칼럼은 오직 <원주신문>에서만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앞으로도 여야를 가리지 않는 날카롭고 지적인 비판 기대하겠습니다. 신속한 기사, 날카로운 칼럼 <원주신문>의 장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