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기쁨의 형식
[안부를 묻다] 기쁨의 형식
  • 임이송
  • 승인 2023.01.15 2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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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나는 오늘 낮에 기쁜 순간과 지점을 찾으려 애썼다. 집안과 바깥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 요즘 들어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모호할 때가 많아서다. 주로 기쁨이 그렇다. 슬픔과 아픔은 매번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행세하는데 기쁨은 좀처럼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평소에 느끼는 몇몇 기쁨은 각기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형식을 지닌다. 오후 두 시쯤 커피를 마실 때, 산채 나물을 곁들인 보리밥을 먹을 때, 따스한 겨울 볕을 바라볼 때, 누군가 소국을 선물해 줄 때,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친구랑 오래 수다를 떨 때, 누군가에게서 손 편지를 받을 때, 이럴 땐 매번 기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그 기쁨이 확장되거나 새롭거나 오래 가지는 않는다.

특별한 것들이 기쁠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호박잎이 알맞게 쪄졌을 때, 맑은 물김치를 담글 어린 열무를 만났을 때, 착용감이 좋으면서 부드러운 양말을 신었을 때, 값싼 펜이지만 똥이 나오지 않을 때, 책을 읽다가 오타와 비문을 발견했을 때, 김장김치가 맛있어 누군가에게 주고 싶을 때, 읽고 있는 책에 나를 각성시키는 문장이 많을 때, 기차를 타고 낯선 곳을 지나는데 문득 익숙한 풍경이 겹쳐 보일 때, 여행지에서 들른 백반집의 밑반찬이 정갈하고 맛있을 때, 주문한 책이 막 도착했을 때, 마음 길이 통하는 벗을 만났을 때, 자주 가는 카페에 내가 즐겨 앉는 자리가 비어 있을 때,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기쁨을 느낀다. 이런 특별한 감정은 이미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과 미세하게 다르다. 반복되어도 늘 내 마음에 새로운 변주가 일어나고 또 그 행위가 끝나거나 그 일이 일단락될 때까지 즐거운 상태가 오래 유지되기 때문이다.

저녁에서야 나는 남편과 매우 기쁜 시간을 맞았다. 원주 토토미로 지은 밥과 삭힌 홍어와 수육과 신 김치의 삼합 조화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새우젓도 식감이 달았고 쌈장도 칼칼하니 맛있었다. 거기에 치악산 막걸리까지 곁들였더니 최고의 밥상이었다. 우리는 잔반 하나 남기지 않았다. 맛있어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또 적당한 양이라서 그랬다. 홍어를 선물로 받는 바람에 수육을 삶았고 알맞은 묵은지가 있어 더 없이 흡족한 식사였다.

언젠가부터 작고 소소한 것들에게서 설렘을 느낀다. 크게 기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평온했던 나와 주변사람들의 일상이 깨지는 걸 자주 겪게 되면서부터다. 기쁜 일들은 언덕 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고. 내 생일에 받은 꽃다발이 점점 시들어 마지막 소국 한 송이만 꽃병에 꽂혀 있을 때도 미소가 지어진다. 사과 한 박스를 잘 골라 겨우내 감탄하며 먹을 때도, 테라스에 있는 대봉이 홍시가 되어가는 것도, 문장에 들어갈 적확한 단어를 찾았을 때도, 시래기가 파랗게 말라가는 것에도 흐뭇한 마음이 생긴다.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 했네’라는. 이에 대해 신형철 평론가는 “한 사람이 더는 살 방법이 없거나 살 이유가 없을 때, 이 세상의 한 인간은 그런 사람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죽으려는 사람을 살게 하려면 커다란 사랑을 만들어 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단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이라고도. 기존의 사랑을 더 크게 만들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복사하여 붙여놓은 것처럼 권태로울 때가 있다. 사랑처럼 기쁨도 재발명해야 한다. 도처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그것들을 낚아채어 선명한 형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틀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지닌다. 점점 파편화되고 분리되고 격리되어 가는 세상이다. 기쁨 또한 조각조각 나눠져 놓치기 십상이다. 각각의 사물과 사람과 일들과 관계와 생각 속에는 행복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정교한 시선과 마음으로 캐치해야 한다. 나는 오늘 낮 동안 그것들을 놓쳤지 싶다. 내일은 서점에 다녀오는 길에 멍게도 사와야겠다. 멍게 향에선 기쁨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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