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엄마가 되고도 엄마가 그립다.
[살며 사랑하며] 엄마가 되고도 엄마가 그립다.
  • 임길자
  • 승인 2023.04.30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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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쌓인 수많은 사연들이
기억을 누르고 있음에도
엄마는 날마다 그립다.
내 아이가 엄마가 되어도 엄마는 엄마가 그립다.
△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5월이 되면 더 그리운 사람! 엄마다. 즐거울 때보다 힘들 때 더 생각나는 사람! 엄마다. 열아홉 살에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삼대(三代)가 한집안에 모여 사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시집살이는 시작되었다. 스무 살에 첫 아이를 출산했다. 아들을 기다렸으나 딸이었다. 시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엄마는 남편이 부재(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한 집에서 혹한(酷寒)의 세월을 살아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엄마는 이미자님의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리며 바느질을 했다. 나를 아랫목에 누이고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바지저고리를 기우며 밤을 새웠다.

나를 등에 업고 11명의 삼시세끼를 차려냈다. 그럼에도 두리반 상에 엄마의 자리는 없었다. 나를 할머니 무릎에 앉혀놓고 자신은 혼자 부엌에서 바가지에 누른 밥을 건져먹다가도 할아버지 큰 기침에 달려 나오던 사람이 내 엄마다.

딸의 교복을 윤이 나도록 다림질 하셨던 엄마다. 동생들의 미래가 맏이에게 달려 있다고 언제나 맏자식의 책임을 강조하셨던 엄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이라던 엄마다. 악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으니 베풀고 살라던 엄마다. 부모는 자식의 등불이 되어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은 현실을 갑갑해 하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책(自責)했던 엄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층층시하(層層侍下)의 서릿발 같은 집안에서도 엄마의 훈육(訓育)은 옳았다.

어느 해 추석에 논노(여성의류 상표)에서 옷 한 벌을 선물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옷은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다. 물었다. “엄마는 옷은 왜 내가 사 드린 옷을 안 입고 걸어만 두지?” 대답하셨다. “어디 외출이나 해야 입고 나갈 텐데... 농사일도 바쁘고 사실 갈 데도 없고... 그렇지만 눈으로는 매일 입고 있는 걸. 눈으로라도 오래도록 입어야 하니 아껴야지”라며 내 손을 잡고 해맑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엄마 마음 읽어드리기 실패! 엄마 몸 살펴드리기 실패! 엄마와 정서 나누기 실패! 뭣 한 가지 제대로 해 드린 것이 없는 형편없는 딸이었다. 나는.

심신(心身)이 몹시 쇠약해진 엄마는 곁에 누어 지난날을 소환했다. “남편도 없는 집에서 그 엄청난 시집살이는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네(딸)가 곁에 있어서 가능했어. 너를 안고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지는 될 걸. 그때마다 새까만 눈을 깜빡이며 엄마와 눈을 맞췄지. 마치 ‘뭐든지 다 말해봐, 다 들어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말도 못 하는 널 남편삼아 친구삼아 그랬던 것 같아. 난 네가 엄마처럼 살까봐 걱정했어. 다행이 공부 잘하는(엄마 생각에)아이로 잘 자라줘서 네가 늘 고맙고 대견했어. 네가 6살이 되던 해에 너의 남동생이 태어났지, 그 후 이 집안에서 나(엄마)의 위치가 달라졌어. 그제야 이 집 가족이 된 것이지. 아들이 뭐라고... 꿈을 꾼 것 같은 세월이었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그저 그렇게 살았어. 이젠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 내가 봐도 볼품이 없어. 너희들의 엄마이기 전에는 나도 꿈 많은 소녀였고,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는데... ”

그 엄마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엄마가 되기도 전에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미안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슬프고, 서글프다. 엄마가 되고도 나는 엄마가 그립다. 내 자식을 곁에 두고도 나는 엄마가 그립다. 사십년 세월이 멀기도 하련만 엄마는 여전히 그립다. 겹겹이 쌓인 수많은 사연들이 기억을 누르고 있음에도 엄마는 날마다 그립다. 내 아이가 엄마가 되어도 엄마는 엄마가 그립다.

가정의 달에 즈음하여 세상의 딸들에게 고한다. 현실의 무게 때문에 엄마가 딸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엄마는 엄마다. 딸을 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엄마는 엄마다. 마음도 만져보고, 기분도 살펴보고, 정서도 나누어 보자. 엄마의 편은 언제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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