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얻은 교훈
[기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얻은 교훈
  • 김미영
  • 승인 2023.06.11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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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알베르게 대문에
'당신의 목적지는 산티아고가 아니라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이다'라고 써 붙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미영 [전 강원도의원]
△김미영 [전 강원도의원]

세상의 모든 길로 일컬어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 프랑스 남부 끝 국경 마을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는 800km의 여정. 지금 산티아고 가는 길은 온통 봄이다. 2008년 초겨울 스페인 그라나다를 여행하며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알게 됐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분이 제주올레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꼭 한번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심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14년 동안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0년 봄에는 피레네산맥을 넘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일이 시작됐다. 그 일을 또 12년 동안 하게됐다. 그리고 오늘 그리움처럼 되어버린 그 앞에 선다. 수없이 검색해 본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시작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마을을 떠나 피레네를 만난다. 

나폴레옹 루트다. 대규모 군대가 산맥을 넘을 때 선택했던 길. 피레네를 넘느냐 마느냐가 모든 전쟁과 문명의 성패를 갈랐을 터. 그 임계지점의 산골에서 독특한 바스크인의 문화가 만들어졌다. 산속 마을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 그 첫 번째 여장을 풀었다. 이제야 오랫동안 간직해 온 그리움을 비로소 마주한다. 피레네를 넘어 본격적으로 스페인으로 접어들며 세상의 모든 숲, 세상의 모든 꽃을 만난다. 포도나무가 되고 싶다. 

수십 년 묵은 포도나무도 봄에는 다시 처음처럼 새싹을 틔운다. 60세가 되어도 70세가 되어도 새잎, 첫 잎을 틔우듯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올리브 나무가 되고 싶다. 척박한 구릉과 언덕에 수수하게 낮은 모습으로 있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올리브 나무 몇 그루 길러보리라 다짐한다. 체리나무 숲, 호두나무 숲, 소나무 숲을 지난다. 

장미, 양귀비, 엉겅퀴, 데이지, 민들레 등 색색의 꽃들이 지천이다. 눈을 들면 하늘이 가득하다. 오른편으로 저 멀리 피레네산맥을 끼고 서쪽으로 내륙쪽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온다. 그 변소까지 왜 굳이 가느냐는 물음에 답을 구해본다. 낯선 풍경, 낯선 공기,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것이 내 삶을 더 풍부하고 아름답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생각보다 순례자들이 많다. 전 세계에서 오직 이 길을 순례하기 위해 온 사람들과 조우한다. 길 위에 지금까지의 삶을 고스란히 올려놓은 사람들. 걷는 속도가 각자 다르니 만났다 헤어졌다가 다른 도시에서 다시 만나곤 한다. 안부를 묻고 정보를 주고받는 가벼운 만남 속에서도 각자의 삶이 느껴진다. 

무엇인가를 잃었거나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사람들. 마무리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 그리하여 '상실'은 결국 '결실'의 다른 말임을 알게 된다. 발이 붓고 통증이 심해진다. 보름 넘게 400km 가까이 걸었다. 부르고스 즈음부터 피레네산맥을 벗어나 칸타브리아산맥의 영향을 받는다. 메세타 고원을 3일째 걷고 있다. 메세타 고원에 들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고 새벽녘에 출발한다. 일출을 원 없이 감상하며 아침의 고요를 온몸으로 느낀다. 

오늘 새벽 어느 알베르게 대문에 '당신의 목적지는 산티아고가 아니라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이다'라고 써 붙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도를 늦췄다. 발이 아파도 참고 부지런히 걸었는데 여러 번 쉬면서 천천히 걸었다. 지금을 사는 것. 지나온 길이나 앞으로 갈 길에 매이지 않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이 순간을 지극히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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