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원주옻칠문화를 낳은 무위당 선생
[기고] 원주옻칠문화를 낳은 무위당 선생
  • 김대중
  • 승인 2023.06.11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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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과 일사 선생의 인연이
없었으면 옻칠문화도시
원주의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원주옻칠기공예관은 원주옻 홍보와 옻칠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한상철 전(前) 시장이 2001년 문을 열었다. 영산(靈山) 치악산과 원주 대표 사찰 구룡사를 찾는 사람들을 겨냥해 소초면 학곡리 구룡사 진입로 변에 세웠다. 그러나 운영을 맡은 사단법인 원주옻칠문화진흥회가 활성화 시키지 못하자 시의회에서는 차라리 문을 닫으라는 요구까지 나오게 됐다. 원주옻칠문화진흥회는 결국 2019년 총회를 통해 손을 뗐다. 원주옻의 역사에 맥을 잇는 상징 시설이 졸지에 문 닫을 위기에 놓였을 때 원주시 담당 직원들의 세 차례에 걸친 부탁에 맡는 인연이 되었다.

2000년 첫해에 ‘세상에 하나뿐인 옻칠카페’ 등을 만드는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이듬해 4월 18일 개관 20주년 및 리모델링 재개관 기념으로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주제는 ‘원주옻칠기공예문화를 낳은 일사와 무위당의 천생연분전’이었다. 일사와 무위당을 알아도 두 분의 각별한 인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사 선생의 제자인 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 선생과 칠화칠 명장 소하 양유전 선생 등 몇 분을 제외하고는 이젠 거의 다 작고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두 분의 인연과 원주옻 역사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었다.

무위당 선생이 원주옻칠문화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궁금해 한다. 원주옻은 일제(日帝)에 의해 명성을 날리게 됐다. 원주는 좋은 옻칠의 산지였지만 옻칠기공예는 없었다. 1957년 태장동에 민간자본으로 세운 국내 최초의 옻칠전문기업인 원주칠공예주식회사 때 인연이 됐다. 치악산 일대 124ha에 옻나무를 재배하면서 생산된 옻칠을 활용하기위해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 나전장 제10호 김봉룡 선생(1902~1994)을 초빙하면서다.

그러나 일사 선생이 원주에 온 첫해에 칠공예주식회사에 4개월 동안 불이 두 번이나 나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물러났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선생을 따라 왔던 장인들은 모두 떠났고 일사 선생도 흔들렸다. 그때 선생을 붙잡아 안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 무위당 선생이다.

무위당 선생은 일사 선생을 모시고 신협을 찾아 당시 500만 원을 대출 받도록 도와드렸다. 일사 선생의 작품 활동을 지극정성으로 도우며 정신적인 교류를 하였다. 원주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던 무위당 선생은 일사 선생의 뛰어난 재능과 고귀한 예술 정신을 원주의 귀한 자산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원주옻칠문화를 전국에 알리는 획기적인 계기도 만들었다. 1988년 5월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무위당과 일사 선생의 제자인 우사 이형만 선생의 서화전이다. 무위당 선생의 서화를 나전칠기 작품으로 준비한 국내 첫 전시였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 완판돼 한살림 설립 기금을 마련하고도 돈이 남았다. 특히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유력 인사들이 대거 관람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원주는 전국적으로 나전칠기 고장으로 도시 브랜드를 갖게 됐다. 무위당과 일사 선생의 인연이 없었으면 옻칠문화도시 원주의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원주의 전통문화를 아끼고 생명을 존중하는 무위당 선생의 정신을 원주의 자산으로 더 키우려했던 생명교육관이 문을 닫았다. 내분과 횡령 문제가 발단이었다. 위탁을 취소시키는 지경이 되도록 어른들은 뭘했는지 안타깝다. 무위당 정신은 정치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교각살우(矯角殺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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