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인간증서
[안부를 묻다] 인간증서
  • 임이송
  • 승인 2023.06.18 2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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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려나 예의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것이 언젠가 우리 민족에게
이기적인 유전자가 되어 흐르지 않을까.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나는 올해 예순이다. 지금 가장 소원하는 건 손주를 보는 것이다. 새 생명을 맞이하고 싶은 바람이 간절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집 위층에선 자주 가구 끄는 소리가 난다. 그 집 손주들이 와서 내는 소음이다. 우리는 한 번도 위층으로 올라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위층 할머니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며 미안해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했다.

우리 큰아이가 예닐곱 살 때였다. 그날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네댓 가정이 한 지인의 집에 모여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어른들이 음식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네들끼리 놀았다. 점심을 먹으려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아래층 아주머니였다. 그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이 낸 소음을 견디다 못해 올라온 것이다. 그날 아래층엔 고3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건 이후 1층으로 이사를 했다.

노키즈존이 생겼다고 하였을 때 두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가게주인의 인심이 고약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엔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 배어 있었다. 또 하나는 마땅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엔 아이들보다 그 부모의 태도나 교육에 화가 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내가 우리 아이들의 행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것처럼.

최근 노시니어존도 생겼다. 60세 이상은 출입금지란다. 나는 이제 그 카페에 들어갈 수 없다. 이번에도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나이든 사람이 모두 진상은 아닐진대 무조건 출입을 막는 행태엔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는 동네카페에 어른들이 가서 여성 점주가 예뻐서 온다는 성희롱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엔, 카페주인에게 미안하고 민망했다.

모든 어른은 어린 아이의 시절을 거쳐 왔고 또 모든 젊은이는 장차 노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걸어오고 걸어갈 길에 대한 연민과 배려와 예의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나이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그가 한 말이나 행동으로 정의되므로 나이에 제한을 둬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건 차별이다. 차별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폭력이다. 어느 집에서건 아이가 태어날 수 있고 또 누구든 노인이 된다.

위층에선 또 가구 끄는 소리가 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들의 놀이가 시작된 모양이다. 어른들의 훈육이 계속되는 한 머지않아 아이들이 조용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60세 이상 출입금지를 보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AI 시대엔 더 이상 노인의 지혜가 필요치 않다. 예전처럼 나이가 힘이나 권위가 되지 못한다. 나도 나를 스스로 품위 있게 유지해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기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는 전공 분야에 대한 증서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것은 ‘인간증서’이다.”두 학교의 교육 목표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심신과 교양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너의 공간과 나의 장소가 구분되고 구별되어지는 순간, 사회는 분열되고 사람 사이엔 벽이 만들어진다. 저절로 훌륭해지는 나라는 없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타인의 기호까지 읽고 아이들은 보이는 기호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다.

며칠 전, 도서관에 전시 중인 이충길 화가의 민화를 감상한 적이 있다. 돼지의 몸에 모란을 그려 넣은 그림이 있었다. 돼지와 모란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우리가 배려나 예의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것이 언젠가 우리 민족에게 이기적인 유전자가 되어 흐르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민화에서처럼 서로에게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로운 존재가 될 것이고. 장차 태어날 손주도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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