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충전소] 어디 사느냐가 중요하다
[지식충전소] 어디 사느냐가 중요하다
  • 최광익
  • 승인 2023.07.02 2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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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살아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소득, 교육수준,
직업, 이웃,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 교육칼럼니스트]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교육칼럼니스트]

퓰리처상 수상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을 통해 물리적 위치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휴대전화, 인터넷, 이메일 덕분에 세계화 정보화에 따른 경쟁 장벽이 사라져 이제는 누구라도 사는 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엔리코 모레티의 <직업의 지리학>은 어디 사느냐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특이한 책이다.

얼핏 시대착오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주장은 논리적이고 다양한 증거로 무장해 반박이 쉽지 않다. 미국 명문 버클리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여러 개의 국제적인 상을 수상한 저명 경제학자인 저자의 명성에 힘입어, 이 책은 2014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후 계속 판을 거듭해서 읽히는 몇 안되는 경제학 서적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경제지도는 숙련된 노동력과 강력한 혁신 부문을 갖춘 도시, 끝없는 쇠락의 길을 걷는 과거 제조업 도시, 어떤 방향을 택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혁신’ 도시는 실리콘 밸리, 오스틴, 시애틀, 보스턴, 뉴욕, 워싱턴 등으로 정보기술, 생명과학, 클린테크, 신물질, 로봇공학, 나노기술, 오락 관련 혁신기업들이 포진해 있다.

사양길의 제조업 도시는 서북부 러스트 벨트(rust belt)를 구성하는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신시네티, 피츠버그, 세인트루이스로 옛날 자동차와 철강으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경쟁력을 잃어 폐허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도시들은 혁신과 쇠락의 사례를 보면서 미래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대부분의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책은 첨단 혁신 도시는 어떻게 번영하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혁신도시의 생명은 새로운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아이디어는 고립상태에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다. 적절한 생태계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는 원래 철도왕이자 상원의원을 지낸 릴런드 스탠포드의 말 농장이었지만, 농장에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되고 인근 버클리 대학과 함께 연구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페이스북, 구글, 야후, 애플, 넷플리스, 유튜브, 테슬라 등 셀 수 없는 기업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실리콘 밸리는 집값이 비싸고 교통체증이 심각하지만 세계적인 혁신기업들은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먼저 두터운 노동시장이다. 이곳은 전문적인 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가진 인재들로 넘쳐난다. 기업도 많고 인재도 넘쳐나기에 고용도 쉽고, 해고되더라도 잠재적으로 고용할 일자리가 널려 있다.

두 번째로 기업을 하려면 전문기술 외에 홍보, 법률, 운송, 판매 관련 인력이 필요한데, 이런 사업 인프라가 잘 조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쉽게 습득할 수 있고, 또 이웃이나 경쟁자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업이나 인재들이 끝없이 모여든다.

미래의 좋은 일자리는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제품, 새로운 기술에서 나온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물리적 자본이 아닌 인재들로부터 나온다. 앞으로 인재 유치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는 이유다.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 보면 협력할 때 가장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이러한 이유로, 어느 곳에 살며 누구와 함께 있는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인재의 집중은 더 많은 인재를 끌어모으고, 이는 더 많은 협력을 낳고, 모든 사람의 기량을 크게 증대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움을 창출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섬유공장은 노동력이 풍부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자리잡을 수 있지만 혁신기업은 근로자 자질보다 둘러싼 생태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본거지를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끔 지역 정치인들이 뜬금없이 대기업이나 연구소를 유치한다고 공약(公約)을 하는데, 생태계에 의존해야 하는 혁신기업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공약(空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디 살아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소득, 교육수준, 직업, 이웃,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강원도에 살아요”라는 답변이 “뉴욕에 살아요”, “파리에 살아요”, “강남에 살아요” 라는 답변처럼 들리게 하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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