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완섭 차관의 조부 김창수 선생
[기고] 김완섭 차관의 조부 김창수 선생
  • 김대중
  • 승인 2023.07.09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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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덕을 쌓으면
자식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아니 이분이 김 영진 전도지사의 부친이시면 김완섭 기재부 2차관의 할아버지시네요?” “맞습니다”

며칠 전 윤석열 정부의 장차관급 개각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공예관을 방문해 1층 옻칠카페 죽간칠서(竹簡漆書)에서 열리고 있는 원주옻역사전시회를 보던 한 시민의 반응이다.

작년에 개관 21주년 기념으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역사를 중심으로 개최한 원주옻역사전시회 시즌 1에 이은 시즌 2 전시다. 시즌 2는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이끈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원주의 역사와 원주옻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원주칠공예주식회사라는 이름은 알 것이다. 66년 전 일이다. 1957년 1월에 태장1동 사무소 뒤편 2천여 평의 부지에 건물 6동으로 건립됐다. 전쟁 직후 폐허의 땅 원주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원주옻의 산업화에 도전한 것이다. 지자체가 나선 것이 아니다. 민간 자본으로 세운 국내 최초이며 유일한 옻칠전문회사다. 옻나무 씨앗 파종에서부터 육묘와 식재, 칠 채취, 옻칠기제품 생산과 옻칠의 필수 희석재인 테레핀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갖춘 회사였다. 직원이 무려 60여명에 이른 당시 원주의 최대 기업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 회사를 세운 사람들은 장인들이 아니었다. 장인들은 1명도 없었다. 주인공 6명이 모두 지역의 기업인들과 유지들이었다. 그중 핵심 역할을 한 분이 바로 김완섭 차관의 할아버지 김창수(1915~1976) 선생이다.

귀래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사립 명문 중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중앙청에 잠시 근무하다 해방이 되면서 퇴사했다. 이후 관직에 나갈 기회도 고사하고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고향 원주의 앞날을 걱정했다. 원주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일제 때 최고로 평가되던 원주옻을 산업화해야 된다는 생각에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 6명의 주주로 참여하면서 회사 설립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총괄한 핵심 역할을 했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원주옻칠의 산업화를 꿈꾼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꿈에 도전한 칠공예주식회사는 4년만인 1961년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지만 대학 선배인 기업가 박만희선생의 투자를 이끌어내면서 극복해냈다. 선생은 박만희선생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전무로서 경영을 도맡다 시피했다. 1968년 화재 사고로 크게 위축될 때까지 초창기 주주들 가운데 홀로 남아 회사를 살리려 혼신을 기울였다. 선생의 원주옻 산업에 대한 애정은 아주 각별했다. 회사옆 사택에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10년을 넘게 돌봤다.

선생은 집에 온 거지에겐 반드시 밥을 먹여 보냈을 정도로 인정이 넘쳤다고 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문창모 박사 등과 깊은 교유(交遊)를 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맑은 영혼의 호인이며 덕이 높은 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동안 김창수 선생의 이런 이야기는 거의 몰랐다. 원주옻역사전시회가 열리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모가 덕을 쌓으면 자식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김차관을 비롯 김승호 인사혁신처장(차관),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은 원주란 땅의 이름을 빛낸 인물들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고향에 명성을 안겨줬다. 이런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선출직 지도자들도 원주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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