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지광국사탑의 귀향
[기고] 지광국사탑의 귀향
  • 김대중
  • 승인 2023.08.06 2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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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탑과 탑비가 분리된다면 어불성설이다.
천년을 마주 보았던 천년의 인연을
끝내 이어주지 못하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나 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가 이미 5백 여 년 전에 고려 땅에 있었구나” 불멸의 조각가 미켈란젤로(1475~1564)가 생전에 지광국사탑(국보101호)을 보았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까.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이름 앞에 불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미켈란젤로가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피에타’ 등 미켈란젤로의 걸작들이 나오기 500여 년 전인 1085년에 탄생한 지광국사탑 때문이다.

우리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이다. 돌탑에 새겨진 문양의 디테일은 백미로 예술성은 물론 역사성 등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석조 조형물들을 압도한다. 불심이 샘처럼 솟는 사찰이라는 의미의 법천사(法泉寺 ). 그 폐사지의 지광국사탑비도 탑에 못지 않게 뛰어난 가치를 갖고 있다.

1962년에 국보 제101호 지정된 지광국사탑에는 세 가지의 큰 의미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탑 자체가 갖는 가치다. 입적한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묘탑, 부도탑은 흔하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의 왕사이며 국사였던 해린(984~1070)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묘탑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역사에서 왕사와 국사였던 승려는 극히 소수다. 명봉산 자락 아래 3만 여 평에 자리잡은 법천사에 왕실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해린 스님의 묘탑을 최고 작품으로 만든 이유다. 여기에 이 탑이 최고의 조각품으로써 갖는 가치까지 더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지광국사탑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상징적인 문화 유산이다. 한민족이 당한 온갖 수난과 비운을 함께 겪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무라타로가 법천사지에서 서울 명동의 병원으로 도둑질해 갔다. 이듬해 다른 일본인 사업가에게 팔려 그의 저택 정원에 전시됐다가 다시 다른 일본인에게 팔려 아예 오사카로 불법 반출됐다. 조선총독부가 나중에 환수 결정을 내려 1912년 12월 경복궁으로 이전됐다. 6·25 때 폭격을 맞아 1만 2,000개로 산산 조각난 걸 1957년 시멘트로 땜질해 붙였다. 문화재청이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있던 이 탑을 2016년 전면 해체·보수 공사에 들어가 5년에 걸쳐 완공해 112년 만에 엊그제 귀향했다.

셋째 지광국사탑이 있던 법천사라는 절이 폐사지이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당시에 가졌던 위상이다. 고려시대에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력뿐 아니라 학문과 정치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조선 최고의 재야 학자 태재 유방선 선생의 은둔지였던 법천사는 학자들과 정치 지망생들이 즐겨 찾고 교유(交遊)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권람과 한명회가 유방선 선생을 찾아 공부하며 조선의 역사를 바꾸었고 높은 학문의 힘과 통찰의 능력으로 서거정, 이보흠 등 시대적 인물들을 길러낸 곳이다.

지광국사탑 보수 공사의 완공과 귀향은 정말 의미가 크다. 원주의 도시 품격을 높이고 인문관광의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더불어 탑이 다시 세워질 위치는 당연히 원래 자리에 보호시설을 갖추면 좋겠다. 묘와 묘비가 함께하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묘탑과 탑비가 분리된다면 어불성설이다. 천년을 마주 보았던 천년의 인연을 끝내 이어주지 못하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법천사지와 지광국사탑과 탑비의 주인인 원주가 이제 그 인연 다시 이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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