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평 공개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평 공개
  • 김은영 기자
  • 승인 2023.10.04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작가”
△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

제12회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4일 제12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에 대한 심사평을 소개했다. 

심사위원회는 “란스마이어는 세계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며 문학의 매력과 힘을 보여주는 작가이며,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힘을 지닌 작가”라고 평가했다.

앞서 심사위원회에서는 추천위원회에서 선정한 세계 작가 37인의 명단을 토대로 심사하여 최종 수상 후보 작가로 마가렛 애트우드(캐나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포르투갈), 코맥 매카시(미국),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오스트리아)를 압축하고 최종 심사를 거쳐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작가를 최종후보자로 선정했다. 

다음은 제12회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평 전문. 

“1954년에 태어난 란스마이어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독일어권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소설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는 엘리아스 카네티상, 프란츠 카프카상, 클라이스트상 등 20개 이상의 국제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고, 20권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란스마이어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탄탄한 문학적 서사를 창조해내는 작가입니다. 또한,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혼합하여 이면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는 경이로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숨은 역사를 발굴하는 열정적인 여행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란스마이어 소설은 세계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역사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문학의 매력과 힘을 보여줍니다.

1984년에 발표된 『빙하와 어둠의 공포 Die Schrecken des Eises und der Finsternis』는 예술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첫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19세기 말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미지의 땅, 북극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북극 탐험대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24명의 탐험대는 항구를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그로부터 2년간 죽음의 북극해에서 혹독한 추위와 빙하의 위협, 식량부족과 질병, 그리고 절대 고독과 죽음의 공포를 체험합니다. 이 소설은 빙하와 어둠의 공포 앞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인내와 투쟁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의 마지막 공간까지도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타자화하는 인간의 오만과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1988년 출판되어 란스마이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최후의 세계 Die letzte Welt』 역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 소설입니다. 주인공 코타가 탐색에 나서는 목적은 로마제국의 세상 끝으로 유배당한 작가 오비디우스와 사라진 그의 책 『변신』을 찾는 것입니다. 마침내 흑해 연안의 귀양지에 도착한 주인공은 놀랍게도 마을 전체가 『변신』의 살아있는 무대가 된 것을 목격합니다. 여기서 신화와 역사, 그리고 이성과 환상의 경계가 없어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울타리가 사라집니다. 2,000년 전의 로마와 20세기 유럽이 시공간적으로 섞여버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탐욕과 자연 파괴, 그리고 이성에 기반을 둔 문명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2006년에 발표된 『Der fliegende Berg』 역시 세상 끝으로 떠나는 탐색 소설입니다.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와 함께 극지 탐험을 다녔던 모험적인 작가의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눈부신 설산의 경이로움 만큼이나 아름답고 리듬을 타는 언어로 경탄을 자아내는 시적 소설입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살던 아일랜드의 두 형제가 ‘날아다니는 산’이라 불리는 전설상의 히말라야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티베트로 향합니다. 이들이 지도상에 홀로 남은 전인미답의 목표를 향해 점점 더 문명 세계와 멀어지는 만큼 독자들은 은밀하게 묻어 놓았던 가족사의 진실에 더 가까워집니다. 이 작품은 자연을 정복하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를 그리고 있지만, 결국 그들이 대면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렇게 문명 세계를 떠나 세상 끝으로 가는 여정은 궁극적으로 개인을 넘어 인류의 여정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입니다.

스스로 반유목민이라 생각하는 란스마이어는 『최후의 세계』를 발표한 후, 오랜 기간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세상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의 발길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대륙은 물론 중국, 일본, 네팔,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아시아 전역에 이릅니다. 아쉽게도 한국은 없습니다. 2012년에 나온 『Atlas eines ängstlichen Mannes』는 이 기나긴 여정을 바탕으로 쓴 여행기입니다. 이 작품은 길을 나선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향점은 다릅니다. 어찌 보면 다양한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고고학적 여행기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전해주는 생태 문학의 느낌을 줍니다. 앞서 언급한 소설들이 도구적 이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타자화했다면, 이 여행기는 지구 곳곳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타자화를 해체’합니다. 이렇게 타자와 만나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역시 나 자신입니다.

란스마이어의 소설 미학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뿐만 아니라 현실과 텍스트의 경계를 없애버립니다. 예를 들어,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요제프 마치니라는 사람이 남긴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을 1인칭 화자인 ‘나’가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니는 탐험대원들의 기록에 열광해 급기야는 그것을 현실에 재현하고 싶은 욕망에 빠집니다. 마침내 어느 날 마치니는 북극 탐험대 루트를 따라 항해하는 배에 오릅니다. 그리고 개썰매를 타고 북극의 심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립니다. 기사 소설에 미친 돈키호테가 편력 여행에 나서듯, 자신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최후의 세계』의 주인공 코타 역시 『변신』을 찾아 세상 끝으로 떠납니다. 최후의 세계 토미에 도착한 주인공은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사라지기는커녕 아예 현실로 구현된 모습을 목격하고 기꺼이 그 픽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현실과 텍스트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독자와 텍스트 등장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존재론적 전복은 우리에게 고정불변의 존재란 없으며 고향의 부재가 인간실존의 기본조건임을 깨닫게 합니다. 고도의 서사 전략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또다시 인간 존재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바로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단언합니다. 란스마이어의 문학은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아울러, 란스마이어는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이렇게 다양한 메시지와 탁월한 문체를 통해 소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한편, 시간의 부침에 저항하는 문학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에게 만장일치로 2023년 박경리문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12회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 (가나다순)                                                                                                                          강자모, 김승옥, 박종소, 신정환, 이세기, 정현기, 최 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