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그리움이 익는 계절
[살며 사랑하며] 그리움이 익는 계절
  • 임길자
  • 승인 2023.10.08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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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때로 ‘의도적 무관심’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다.
관심과 집착이 구별되어야 하니 말이다.
△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도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계절이다. 들판에선 농부들의 정성으로 채워진 곡식(穀食)들이 무르익고, 뒷산에선 오색단풍이 멋을 더하고 있다, 코발트 빛 고향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다채로운 모양으로 수를 놓고, 들꽃사이를 넘나드는 고추잠자리가 유난히 정겹다. 서쪽하늘에 해가 기울면 요란하게 들려오는 아버지의 경운기 소리가 오늘도 무사함을 알린다.

지난 추석 즈음에 여시재를 방문했던 귀한 손님을 소개한다. 오전 9시 30분쯤에 백발의 두 노인이 들어섰다. 일주일 내내 문을 닫아 둔 곳이다 보니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이 계셔서 그냥 안으로 모셨다. 백발의 한 노인은 1927년생, 또 한 노인은 1952년생, 두 분은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평소 코스모스를 좋아하셔서 가을이면 아들 손을 잡고 코스모스를 찾아 소풍을 다닌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카페 안에 걸린 여러 작품(서예)들을 둘러보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예전에 붓글씨를 썼다우. 전국 휘호대회에도 많이 찾아다녔지. 일본과 중국 서예작가들과 교류전도 여러 번 했어. 민심무상(民心無常)이라... 그렇지. 다 덧없음이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세월이 참 무심해. 이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손이 떨려 글씨를 쓸 수도 없고, 자꾸 잊어버리니 글을 읽을 수도 없어. 그쪽(필자)이 낯이 익은데 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나? 도향(필자의 아호)도 불러본 적이 있는 것 같고...이젠 바보가 되었어. 아무것도 몰라. 하하하”

어르신은 지난 30여년 나와 함께 작품 활동을 했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단막극처럼 스치기는 하는데 연결은 어려운 것 같았다. 현재 인지증(치매) 진단을 받고 주간보호센터를 나가신다고 했다. 단기기억은 많이 잃었음에도 어린 시절 학습한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아직도 외우고 계셨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하셨지만 유복(有福)한 가정에 막내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단다.

위로 오빠만 네 분이 계셨는데 지금까지 써먹었고 산 한자들은 그 시절 오빠들이 알려준 것이라고 했다. 잠시 바깥을 응시(凝視)하시던 어르신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큰 오빠가 보고 싶다. 그립다. 참 그립다. 오빠가 떠난 지 육십년은 넘었을 거야. 이젠 백골(白骨)이 진토(塵土)가 되었을텐데... 그래도 내 마음엔 여전히 오빠가 있어.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아들! 가을 코스모스길 소풍을 몇 해나 더 볼래나?” 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말없이 어머님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 몸의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40년 전에 생모(生母)를 잃었다. 가을 들녘 코스모스가 계절의 향기를 더하던 10월 어느 날 엄마는 내 곁을 훌쩍 떠나셨다.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그리움은 깊이를 더해간다. 강산도 여러 번 변했으니 지난 사연들일랑은 적당히 잊혀질 법도 한데, 그리움은 바닥이 없는 우물인 듯싶다. 주말이면 홀로 계신 아버지를 만나 밥을 먹고 수다를 떨기 시작한 지 삼년이 되었다. 늘 정다운 이야기만 나누는 건 아니다.

몸 안에 숨겨져 있던 예민한 날들이 간간히 뾰족뾰족 고개를 들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때로 ‘의도적 무관심’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다. 관심과 집착이 구별되어야 하니 말이다. 부재(不在)가 존재(存在)를 증명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대화가 얽힐 때면 부재(不在)를 생각한다. 방송인 이금희님이 ‘어른들을 위한 말하기 수업’에서 “타인의 말은 귀로도 듣지만 눈으로도 듣는다.”고 했던 말이 귀에 꽂힌다.

가을꽃 한 송이에 가던 걸음이 멈춰진다. 그리곤 빨갛게 노랗게 달려있는 열매와 그 나무들에게 눈빛을 건네며 가을의 들머리를 살핀다. 스산한 바람이 곁을 스치며 아직은 살아 봄직하다고, 그러니 좀 더 용기 내어 보라고 내 등짝을 치고 간다. 그리움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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