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고영민 作 / 나이테 속을 걸어
[시가 있는 아침] 고영민 作 / 나이테 속을 걸어
  • 원주신문
  • 승인 2023.11.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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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속을 걸어

고영민

제재소 옆을 지나다가

담 옆을 켜놓은 통나무 하나를 본다

잘린 단면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여려 굽이 에돌아 만들어진 나무 속 등고선

해발 몇백 미터의 산을 품고

걸어온 첩첩의 붉은 산을 품고

나무는 산정을 오를수록

점점 몸피와 나이를 줄인다

청명한 공기와 햇빛으로부터

아득히 멀고 먼

걸음을 옮길수록 숨막히고 어두운

나무의 안, 안

가는 실금의 첫 나이테가

제 생의 마지막 등고선,

최고의 산봉우리였다네

숨을 고르며 오랫동안 산정에 서 있다가

하산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 제 신고 온 투박하고 낡은 신발을

산속에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워 있네

고영민 시집 『악어』,《실천문학사》에서

생명을 알고 시를 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요즘 한 달에 수천 편의 시를 읽으면서 생명을 알고 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생명력 있는 시가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감각에만 의존하여 시를 쓴다는 결론이다. 생명력이란 것은 살아 있는 것, 자생의 힘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시에서도 그 시 자체가 자생력을 갖는다는 것은 시가 충분하게 익어 시의 맛이 나고 시의 씨가 익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통찰력을 지닌 시인들은 익히 그 맛을 잘 알고 쓰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시인들은 그 생명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감각에 의존한 언어의 횡적인 나열을 두고 시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수 없이 쓰여 있음을 나는 본다. 세상의 낱알의 씨앗들이 다 싹튼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 아닌가 한다. 모처럼 그런 관점에서 고영민 시인에게서 생명력 깊은 풋풋한 힘을 맛 볼 수 있었다. 이 시 ‘나이테 속을 걸어라’라는 시편에서도 시인은 나무의 등 곡선 만을 보고도 충분히 나무의 내력을 따라 험하고 긴 생명의 나고 드는 모습을 읽어 낸다. 뿌리가 제 신발임을 알고 이 세상 살다 가는 그날 고스란히 벗어두고 온다는 인간적 애정을 이끌어 내는 시인의 참다운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시란 다 버리고 간 그 나머지 하나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그 생명에 대한 존재성을 진실하게 받아내는 모습이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한다. 때문에 고영민 시인은 생명이라는 것 자체를 두고 죽고 사는 것 자체가 생명이 아니라 존재성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의지 속에 존재함을 찾아가는 듯하다. 이 시에서는 첫 등고선이 생명의 시작이고 마지막 운명의 깊은 삶의 물음처럼 그어져 있음을 나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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