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유정임 作 / 검은 비닐봉지
[시가 있는 아침] 유정임 作 / 검은 비닐봉지
  • 원주신문
  • 승인 2023.12.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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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

유정임

 

무엇이든 담고 있어야만 지속되는 그의 생

그러나 지금 그는 빈 몸이다

 

너무 성한 몸으로 끝나버린 목숨을 이고

그가 무모하게

로터리에서 큰 트럭 밑으로 기어든다

트럭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깔아뭉갠다

바퀴 밑에 깔렸던 그의

검은 오기가 푸르르 트럭 뒤를 잠시 따라간다

뒤따라가던 택시가 그를 받아넘긴다

그가 길 밖으로 나뒹군다

다시 비실비실 길 안으로 들어선다

깔리고 채우고 뒹구는 동안 어느새

몸이 다 찢겨져 너플댄다

 

바람에 밀려 잠시 내 시야를 가리는

모진 영혼 하나

유정임 시집《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리토피아 에서

우리 서민들의 생이 저 검은 비닐봉지 같은 삶을 담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비닐봉지라는 흉흉한 모습 그 자체가 한 영혼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하면, 얼마나 나약하고 힘없고 거대한 힘에 밀려 살아야 하는가 때문에 유정임 시인은 ‘모진 영혼’이라 결론을 냈는지 모른다. 우리 사는 그 자체가 모질다 못해 살점 뚝뚝 떼어주는 식육점 고기살이라도 담아내는 검은 봉지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다. 이 시대의 트럭이라는 거대한 힘...그 힘들은 비닐봉지 같은 생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이 없다. 때문에 수백수천의 검은 비닐봉지 같은 노동자, 서민을 깔아뭉갠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 검은 봉지들 빌딩 유리차에 붙어 앞을 가리려면 거대한 휘오리 바람이라도 불어야 한다. 그 회오리 바람 일으키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언젠가 분명 검은 봉지의 그 빈틈없는 혀는 하늘 높이 치솟아 별을 뚝 담아낼 것 같은 삶으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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