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치악산과 태종 이방원
[기고] 치악산과 태종 이방원
  • 김대중
  • 승인 2023.12.2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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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은 원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영혼입니다.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태종 이방원은 13세 때부터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서 3년간 글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각림사는 현재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입니다. 이후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아 태종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태종은 재위 중에 각림사를 두 차례,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선양한 이듬해에도 한 차례 들렀습니다.

태종 17년(1417년) 2월 2일 태종실록 33권에 왕의 사냥터인 강무장(講武場, 왕이 직접 참가하는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 행사) 문제로 태종이 진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정부 좌의정 박은·우의정 한상경이 강무할 곳을 올렸는데, 사인(정사품 벼슬)심도원을 시켜 아뢰기를,

"충청도 순성(蓴城)을 춘등 강무장으로, 강원도 횡성을 추등 강무장으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횡성은 곧 전일에 정부와 대간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곳인데, 그때에는 어찌 한 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느냐? 또한 지금은 강무한다는 명령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내느냐? 나더러 각림사에 간다고 핑계하여 강무하지 말라는 말이냐? 내 어찌 강무하고자 했겠느냐? 그러나, 강무는 옛 제도인 것이다. 만일 강무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 앞서 강무하였을 때에 여러 재상과 대간이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곧 임금의 악을 조장하는 것이다. 원주의 각림사는 내가 나이 어렸을 적에 유학한 곳이므로, 사우와 산천이 매양 꿈속에 들어오는 까닭에, 한 번 가 보고 싶었을 뿐으로 애초부터 부처를 위함은 아니었다. 만약에 눈이 녹기를 기다려서 간다면, 반드시 ‘이를 핑계 삼아 강무한다.’ 할 것이니, 모름지기 눈이 쌓였을 적에 가야겠다."

태종이 사냥을 핑계로 각림사의 부처께 불공을 드릴까봐 신하들이 간언을 올리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조선은 숭유억불로 사찰이 크게 억압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 어렸을 때 글 공부를 하던 각림사는 예외였습니다.

특히 “내가 나이 어렸을 적에 유학한 곳이므로, 사우(寺宇)와 산천(山川)이 매양 꿈속에 들어오는 까닭에, 한 번 가 보고 싶었을 뿐으로 애초부터 부처를 위함은 아니었다.”는 대목은 뭉클합니다. 항상 꿈을 꿔 가보고 싶었을 뿐이라니요.......태종의 마음을 신하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치악산의 가치를 지금 사람들이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또 내시별감을 보내 치악산 산신령께 제를 올렸으며 아들 세종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제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특정 지역의 산에 대해 국왕이 이처럼 애정을 가진 산은 치악산이 유일합니다. 태종 때 금산(禁山)으로 지정됐으며 왕실의 관, 궁궐 건축, 군함 건조에만 사용하는 최고급 소나무인 황장목을 나라에서 보호하기위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 정상 비로봉에 황장금표가 세워졌습니다. 이 금표가 무려 5개나 있는 신성시된 산입니다.

외적들이 침입하는 국난 때마다 오랑캐와 왜구들을 물리치는 구국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산도 갖지 못한 위대한 역사와 구룡사를 비롯 황장목숲길 등의 풍성한 역사문화 자산과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198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습니다. 치악산은 원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영혼입니다. 역사 문화 콘텐츠의 보고입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모르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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