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법천사지의 환골탈태
[기고] 법천사지의 환골탈태
  • 김대중
  • 승인 2024.01.07 2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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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미륵사지 옆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습니다.
법천사지 옆에 국립박물관을 유치하면 참 좋겠습니다.
△김대중 [원주옻칠기공예관장]
△김대중 [‘황장목, 금강소나무로 창씨개명 되다’의 저자] 

돌에다 새긴 게 맞는지 두 눈을 의심할 정도의 조각 솜씨를 보여준 고려의 어느 무명 석공의 걸작. 섬세함과 정교함, 그리고 화려함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석탑. 국보 제101호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이야기입니다. 올해 법천사지내 유적전시관에 112년간의 슬픈 유랑을 마치고 본래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지광국사탑.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처럼 너무 아름다워 대한민국 근현대 비운의 역사를 함께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원주 출신의 지광국사 해린은 유학(儒學)에 뛰어났으며 문장에도 출중했습니다. 문종때 왕사와 국사를 지내며 국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기에 가장 아름답다는 부도탑을 사후에 왕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법천사는 고려 법상종의 대표 사찰로 고려중기에 최대 전성기를 누리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폐사지는 현재까지 발굴, 확인된 건물이 40동을 넘었고 터가 5만여 평에 이릅니다. 저녁때면 밥 지을 때 쌀 씻는 물로 앞개울물이 뿌옇게 흘렀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법천사 주변 절집으로 전국의 인물들이 찾아와 글공부하고 머물며 학문을 논했습니다. 폐사지 이후에는 문인들의 시문의 소재가 됐습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한명회와 권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종을 폐위시킨 계유정난을 일으켜 숙부인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린 핵심 인물들입니다. 몰락한 양반가 자손인 한명회는 수차례 걸쳐 도전한 과거에 실패한 후 경복궁지기로 살았습니다. 미관말직이었습니다. 한명회는 이때 권람을 만나 벗이 되어 함께 세상을 주유(舟遊)하던 중 법천사에 유명한 태재 유방선이란 대학자의 은거 소식을 들었습니다.

송도에서 고려말 1388년에 태어나 1443년 원주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난 유방선은 목은 이색의 외손입니다. 태재선생은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중 아버지가 태종 이방원의 처남 민씨 형제의 옥사(獄事)에 연루되는 바람에 무려 19년이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40의 나이에 원주 법천사에 정착후 은둔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의학 음양 천문 지리 등 능통한 재야의 대학자 태재 선생을 만난 한명회와 권람은 삶에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후 세상을 뒤엎는 계유정난을 성사시키게 됩니다. 이들뿐 아니라 서거정, 강효문, 이보흠 등 최고의 학자들도 태재 선생을 찾아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허균, 정시한, 정범조, 안석경 등이 폐사지 법천사를 찾아 이를 소재로 시문을 남겼습니다. 인근 부론면 손곡리에 은거하던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던 허균의 시가 법천사지의 일부 역사를 보여줍니다.

“금년(1609년) 휴가를 얻어 마침 지관(智觀) 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 법천사에서 1년 거주하였다’고 하므로 지관을 이끌고 일찍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터와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허 균의 ‘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 내용입니다. 1589년까지 있었고 임진왜란 때 전소됐으며 허 균이 들른 1609년엔 이미 폐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구가 다는 아니지만 익산미륵사지 옆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습니다. 법천사지 옆에 국립박물관을 유치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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