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최영철 作 / 그림자 호수
[시가 있는 아침] 최영철 作 / 그림자 호수
  • 원주신문
  • 승인 2024.01.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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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호수

최영철

 

겨울 깊어 바람이 서늘해지자

호수를 에워싼 수양버들

누울 자리 찾아 슬슬 가까이 내려왔다

호수를 따라 둥글게 모여선 가지들

한파가 닥치면 어서 발을 집어넣으려고

캐시밀론 담요를 깔아놓았다

서로 사우지 않으려

저마다 대중해둔 그 담요는

정확한 일인용이다

지금 서둘지 않으면 이제 곧 바람이 와서

호수 전체를 얼음으로 덮을 것이다

수양버들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

단잠에 빠지려는 물의 지느러미를

자꾸만 흔들어 깨운다

잠들지 마 잠들지 마

벌써 저쯤에서는

곯아떨어진 물의 등을 밟고

얼음이 걸어오고 있다

슬금슬금

남의 집에 발을 찔러 넣어보는 살얼음들

수양버들 그림자가 그 차가운 발목을

덮어주고 있다

최영철 시집 『그림자 호수 』,[창작과 비평사]에서

옛 사적 발굴 장소에 가 보면 주춧돌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듯한 집터 등을 볼 수 있다. 이런 발굴을 기초로 하여 살아온 과정에 대한 문화적 접근을 시도한다. 물론 그 속에 굳어 잇는 그런 형체를 중요시하지만, 이 시에서 보면 부여 궁남지는 왕이 살았던 연못이다. 그 연못에 든 그림자가 한겨울 얼어붙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상에 접근해 있다. 어쩌면 살얼음에 동동 발을 구르는 바람 소리 같은 시다. 그림자만 가득한 옛 영화의 터에 가득했을 백성의 피눈물이 출렁일 때마다 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늘에 뜬구름이 한가롭게만 보여 세상도 그러할 거라 생각을 했는지... 그림자만 가득한 궁남지 연못에 든 세월도 꽁꽁 얼어붙은 시간 같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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