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충전소]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
[지식충전소]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
  • 최광익
  • 승인 2024.03.03 2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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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의 묘비명에는
<조선황실전례관>이라고 새겨져 있다.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교육칼럼니스트]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교육칼럼니스트]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Marie Antoinette Sontag)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종으로부터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황실전례관으로 임명된 이 독일계 여성은 10년 이상 조선왕실 살림을 총괄했다. 2005년 오페라로 탄생한 극작가 차범석의 희곡 「손탁호텔」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활동이 중심이지만 바로 이 여성이 얼마나 조선을 사랑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손탁은 1838년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분쟁지역인 알자스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손탁의 부모는 손탁이 어렸을 때 사망하여 손탁과 형제들은 온갖 고생을 피할 수 없었다. 후에 손탁의 여동생 파울리네는 명문가 후손인 알렉산더 칼로비치 마크와 결혼하는데, 이것이 손탁 자매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마크는 조선의 러시아 초대 공사로 부임하는 베베르의 부인 유제니의 오빠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손탁은 베베르의 차남 오이겐의 보모 자격으로 1885년 한양에 오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중국학을 전공한 러시아 외교관 카를 폰 베베르(Carl von Waeber)는 요코하마 부영사와 텐진 주재 러시아 공사로 근무하다 1885년 9월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 겸 총영사로 한양에 도착한다. 역사교과서에서 아관파천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이 인물은 사려깊고 신중한 외교관이자 지리학자였다. 부임 초 베베르는 한양 주재 외교관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많은 외교관들이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조선에 부임하여 베베르 부인과 손탁은 이들을 위해 관저에서 음악회와 무도회를 열곤 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200명 남짓한 한양의 서양 외교관 사이에 손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명성황후와 상궁 두 명을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왕실 수행원들과 함께 1년 넘게 체류했다. 베베르와 공사관 직원들은 고종이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공사관 부지 내에 조선식 가옥을 짓고 매일 고종을 알현해 우호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베베르 부인과 손탁 역시 고종을 위해 조선의 궁중 의전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종은 손탁의 시중드는 방식과 요리 실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녀가 만든 커피에 곁들인 각종 과자를 좋아했다.

1897년 2월 여론에 떠밀려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10월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조선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전격적으로 손탁을 황실전례관으로 발탁한다. 외국 여인이 갑자기 임명되자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녀의 헌신과 실무능력으로 비판은 점점 잦아들었다. 손탁은 1897년부터 1909년까지 조선황실에서 궁내부 살림뿐 아니라 외빈 연회와 리셉션도 총괄했다. 고종은 손탁이 집무실로 사용할 기와집과 부지를 하사했다. 이 부지 위에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한성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빈관이 건립된다.

손탁빈관은 곧 한양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대한제국에 온 여행자, 전문가, 외교관들이 사업과 정치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꼭 들려야 하는 명소가 된 것이다. 요리가 훌륭하여 미식가들이 찾는 인기장소이기도 했다. 단골손님으로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언론인 토마스 베델을 비롯해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물론, 일설에는 러일전쟁 후 영국의 식민지 담당 국무차관이었던 윈스턴 처칠도 손탁빈관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한다. 조선 측 인사로는 민영환,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이 자주 이용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전 손탁빈관은 프랑스인에게 매각되었고, 1917년 이화여고가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이 건물을 매입하여 1923년 철거될 때까지 기숙사로 사용했다.

손탁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눈앞에 둔 1909년 9월 한성을 떠났다. 부자가 된 손탁은 조선에서 얻은 수양아들 이의운, 일본인 시녀 모다 다카하시, 애견 아홉 마리를 대동하고 유럽으로 돌아가 프랑스에 정착했다. 손탁은 빌라를 매입해 택호를 ‘고요한 아침’으로 정하고 다국적 지인들에게 숙소로 제공했다. 1922년 7월 사망한 손탁은 칸의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손탁의 묘비명에는 <조선황실전례관>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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